“내가 그린 그림은 이게 아닌데”…시장 ‘반란’에 당황한 트럼프, 극복할 수 있을까 [노영우의 스톡 피시]

노영우 전문기자(rhoyw@mk.co.kr) 2025. 4. 19.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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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달러와 고금리.’

물과 기름처럼 함께 섞이기 어려운 단어들이다. 글로벌 자금은 금리를 따라 움직인다. 물이 아래로 흐르듯 돈은 금리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흘러간다. 이 때문에 금리가 높은 국가의 통화는 강세를 보인다. 그런데 최근 글로벌 금융시장에서는 미국 금리는 올라가지만 달러는 약세를 보이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책이 만들어낸 비정상적인 흐름이다. 트럼프의 정책은 시장을 이길 수 있을까. 향후 금융시장 향배가 주목된다.

이미지 출처 게티이미지
달러와 금리는 찰떡궁합이다. 2024년 1월 이후 올해 3월말까지 미국 10년 만기 국채 금리와 주요국가 대비 달러 값을 표시하는 달러인덱스간 상관계수는 0.85에 달한다. 상관계수가 1에 가까울수록 움직이는 방향이 같다는 의미다. 금리와 달러간의 인과관계는 무엇이 먼저인지는 따지기 어렵다. 그래도 굳이 따져보자면 미국의 경우에는 금리가 먼저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통화정책과 경기흐름에 따라 시장 금리가 형성되고 이 금리의 흐름에 따라 달러 값이 영향을 받는 구조다.
트럼프 정부가 출범 후에도 이런 흐름은 이어졌다. 지난해 11월 연 4.1% 수준이었던 10년 만기 미국 국채 금리는 올해 2월 중순에는 연 4.6%까지 올랐다. 미국이 전 세계를 상대로 상호 관세를 매기겠다고 엄포를 놓자 시장이 반응한 결과다. 미국의 관세를 높이면 미국 물가는 오르고 물가가 오르면 미국 연준은 기준금리를 올린다. 이런 분위기가 장기금리를 끌어올렸다.

금리는 2월 중순 이후 반전됐다. 미국이 관세를 높이면 미국 경제가 침체를 겪을 것이라는 염려가 확산됐다. 경기 침체기에는 자금수요가 줄어 금리는 하락한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 미국 국채 10년물 금리는 4월초에는 연 3.9%까지 떨어졌다. 이때까지 금리와 달러 값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금리가 오를 땐 달러인덱스도 108을 넘어설 만큼 강세를 보였다가 금리가 떨어지면서 달러 값도 103선까지 하락했다.

4월 들어 딜레마에 빠진 시장
금리와 달러간 정상적인 흐름은 4월 들어 꼬이기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4월2일 중국(34%), 일본(24%), 유럽(20%), 대만(32%), 한국(25%) 등에 고율의 상호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후 미국 국채금리는 4월14일에는 연 4.5%까지 올랐다. 금리 상승과 함께 달러인덱스는 99.3까지 떨어졌다. ‘고금리 약달러’라는 수수께끼 같은 현상이 뚜렷해졌다.

과거와는 다른 시장 흐름이 형성된 이유로는 ‘트럼프의 큰 그림’이 노출되면서 시장이 발작 증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를 촉발한 것이 스티브 미란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위원장이 작성한 ‘미란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미국이 무역적자와 재정적자의 ‘쌍둥이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100년 만기 채권을 발행해 기존에 미국 채권을 갖고 있던 나라들의 채권을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현재 많은 나라들이 보유한 미국 국채는 만기가 10년 이하다. 이들이 갖고 있는 채권을 100년 만기 채권으로 대체하면 미국은 재정적자 부담에서 탈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장에서 채권금리도 낮출 수 있다. 금리가 낮아지면 미국이 약달러를 유도해 수출 경쟁력도 확보할 수 있다. 미란은 보고서에서 미국이 ‘안보우산’을 제공하고 관세를 낮춰주는 대가로 100년 만기 채권을 떠넘기는 ‘마러라고 합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천기누설된 트럼프 정책
황당한 얘기지만 트럼프의 정책이 점점 미란 보고서를 닮아가면서 채권시장의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관세폭탄 다음은 영구채 떠넘기기가 도사리고 있다면 미국 채권을 미리 팔아버리는 것이 이익이라는 생각이 시장에 확산됐다. 그러자 미국국채 투매 현상이 일어났다. 각국이 시장에서 미국 국채를 던지면서 미국 국채 값은 떨어지고 금리는 올랐다.

미국 국채와 함께 미국 달러에 대한 신뢰도 떨어지면서 달러 값도 동반 하락했다. 채권시장에서 금리가 오르면 누구보다 미국이 가장 큰 타격을 받는다. 국채 값은 떨어지고 정부부채로 갚아야 하는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때문이다.

채권 시장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트럼프는 중국을 제외한 나라들의 상호관세 부과 일정을 90일간 미뤘다. 그러면서 채권시장에서 금리 인상 추세는 주춤해졌다. 관세로 협박하고 영구채를 떠넘기려던 미국의 계획은 차질을 빚게 됐다.

트럼프의 ‘마러라고 합의’ 구상은 과거 미국의 파격적인 정책을 연상시킨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모범국가로 불리는 미국이 극한 상황에 몰리면 언제든 시장 규칙을 깰 수 있음을 역사는 보여줬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1971년 8월 달러를 가져오면 언제든지 금으로 바꿔주겠다는 약속을 한순간에 깨버렸다. 미국은 그동안 전 세계를 상대로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는 금본위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갖고 있는 금보다 훨씬 많은 달러를 찍어냈고 이를 눈치 챈 각국은 달러를 금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그러자 미국은 일방적으로 더 이상 달러를 금으로 바꿔줄 수 없다고 선언했고 달러를 금으로 바꾸려던 나라들은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았다.

위기때마다 시장규칙 파괴하는 미국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1985년 ‘플라자 합의’를 통해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 가치를 한순간에 폭등시켰다. 이를 통해 미국은 약달러를 유지하고 수출경쟁력을 확보했다. 일본은 이 합의 이후 엔화가 30%이상 폭등해 수출 경쟁력을 잃고 경제는 ‘잃어버린 30년’에 빠지게 된다. 2008년에는 미국이 촉발한 금융위기를 막기 위해 연준이 달러를 무제한으로 푸는 ‘양적완화’ 정책을 들고 나왔다. 화폐가치를 보전해야 할 중앙은행이 화폐가치 훼손에 앞장섰다. 당시 미국 주택 버블이 붕괴되면서 실물경제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내놓은 응급처방이다.
트럼프도 미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 탈출구가 필요했고 이에 대해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이 미란의 ‘마러라고 합의’ 구상이다. 이 구상은 시작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과거와는 여러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먼저 미국의 힘이 예전만큼 세지 않다. 중국은 경제력과 기술력 측면에서 미국에 근접하고 있다. 중국의 제조업이 미국 시장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관세폭탄을 투하하면 미국이 더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금융시장에서 미국이 처한 위치는 더 위태롭다. 세계 각국이 보유하고 있는 미국 국채는 총 3조8106억 달러에 달한다. 상황이 안 좋아지면 언제든지 시장에 나올 수 있는 물량이다. 중국은 미국 국채를 시장에서 계속 팔고 있다. 중국은 미국과 적대적 관계가 지속되는 한 중국의 국채 매도는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일본도 미국의 우방이라고 하지만 채권시장에서 미국 국채를 지난 1년간 613억 달러나 팔면서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미국이 실물경제에서는 관세를 내세워 압박하고 있지만 금융시장에서는 ‘빚쟁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유난히 취약해보이는 한국상황
과거 ‘금태환 정지’나 ‘플라자 합의’는 전격적으로 이뤄지면서 시장이 대비할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반면 트럼프의 ‘마러라고 합의’ 전략은 시행도 하기 저에 시장에 노출되면서 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그러자 트럼프의 관세정책도 일관성을 잃어가고 있다. 관세폭탄을 투하했다가 거둬들였고, 거둬들인 후 다시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히는 등 오락가락하는 모습이다. 트럼프의 전략이 시장을 상대로 제대로 먹힐 수 있을지 의문이다. 결국 트럼프의 전략은 소리만 요란한 빈 수레가 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일부 국가는 희생양이 될 것이라는 염려도 제기된다. 한국도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는 이유다. 한국은 대미 무역흑자는 많고 외환보유고도 4000억 달러가 넘는다. 미국의 안보 우산도 제공받고 있다. 미국이 안보와 관세를 미끼로 한국에 장기채권 매수를 압박할 경우 협상력을 제대로 발휘하기는 어려운 환경이다. 어느 때보다 실리를 위한 대미 외교·경제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스톡피시(stockfish)] 중세시대에는 대구와 청어 등 생선을 잡아 오랫동안 저장하는 방법이 국력의 상징이었습니다. 말리는 것부터 시작해 소금에 절이는 것까지 생선을 잘 저장해 파는 나라가 세계경제 패권을 장악했습니다. 저장된 생선을 의미하는 ‘스톡피시’는 당시 기술과 경제력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21세기에도 국가간 기술·무역 경쟁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스톡피시’는 세계 경제를 진단하고 혜안을 제시하는 칼럼을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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