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의 근미래의 풍경] 곳곳에 민원 응대 AI… 3시간 하소연해야 인간이 받는다고?

장강명 소설가 2025. 4. 15.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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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기술이 인간의 삶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STS(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과학기술과 사회 연구) SF’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써온 장강명 작가가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가 보게 될지도 모를 기묘한 풍경을 픽션으로 전달합니다.소설 내용은 허구이며 실제 행정기관과 무관합니다

10회 #민원 대응

민원 전화 대응을 처음으로 인공지능에 맡긴 한국의 공공기관은 충주시였고, 다음은 국립생태원이었다. 방문 민원인 대응을 처음으로 로봇에 맡긴 공공기관은 금융위원회였고, 다음은 김포시였다. 초기에는 AI가 민원 내용을 요약해 담당자에게 전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점점 공공기관도 금융회사와 통신 회사처럼 민원 업무 전체를 AI에 맡기게 됐다. 국민건강보험공단과 주택도시보증공사는 아예 인공지능 회사에 외주로 넘겼다.

물론 그런 일감을 가장 많이 수주한 곳은 대기업 네카팡이었다. 여러 지방자치단체의 전국공무원노동조합지부가 ‘조합원 절대다수가 AI 민원 응대에 긍정적이라고 답했다’는 내용의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악성 민원인들이 ‘민원 폭탄’을 넣거나, 담당 공무원을 전화로 협박하거나, 민원 센터로 흉기를 들고 찾아와 난동을 부리는 일은 2020년대부터 큰 문제였다.

공무원 노조는 민원 담당자 보호 방안을 마련하라는 요구를 계속해 오던 차였다. 몇몇 악성 민원인들은 공공기관들이 민원 응대를 AI에 맡긴 정책을 놓고 법원과 국민권익위원회, 인권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했다. 정부에서 충분한 지원을 받을 국민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이유였다. 몇몇 시민 단체는 공공기관이 AI 프로그램을 쓰거나 민원 응대를 AI 회사에 아웃소싱하는 과정에서 개인 정보가 유출된다고 소송을 냈다.

시간은 걸렸지만 결국에는 공공기관이 민원 응대 AI를 써도 괜찮다고 결론이 났다. 재판 과정에서 네카팡 측이 법원에 제출한 자료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벌인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참가자들이 상대가 인간 담당자인지 민원 응대 AI인지 전혀 가늠하지 못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들이었다.

몇 년 뒤 한 언론이 ‘공공기관 AI 민원 응대가 바꾼 풍경’이라며 특집 기사를 실었다. 기사에 따르면 공공기관들이 민원 응대를 AI에 맡긴 뒤로 각 시도 경찰청의 112신고센터로 걸려오는 전화가 크게 늘었다고 했다. 112신고센터는 신고 전화를 인간 경찰과 AI 민원 응대 시스템이 함께 받게 돼 있었다.

AI 민원 응대 시스템이 신고 내용을 듣고 장난 전화인지 아닌지를 포함해 분석 정보와 해야 할 조치를 제안하기는 하지만 최종 결정은 인간 경찰이 했다. 그렇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정부에 항의할 내용이 있고 인간 담당자가 그 항의를 듣게 하려면 112에 전화를 걸면 된다’고 여기는 악성 민원인이 늘었다고 기사는 전했다.

기사에 따르면 공공기관과 달리 백화점과 고급 호텔, 명품 회사, 수입 자동차 회사는 인간 직원이 근무하는 VIP 전용 고객 센터를 더 확대하고 있었다. 이 고객 센터 중에는 24시간 운영하는 곳도 있었다. ‘AI가 아닌 사람에게 항의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비싼 서비스가 됐다고 기사는 분석했다.

기사에는 ‘인간은 자신이 다른 인간보다 우월하다는 감정을 즐기지, AI에 명령하는 걸 즐기지는 않는다’는 문장도 있었다.

‘민원 응대 AI 박살 내는 법’이라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글이 온라인에서 인기를 모으고, 그 글에 나온 요령을 실제로 실행하는 이들이 있다는 우려도 기사에 나와 있었다. 앞뒤가 안 맞는 주장을 반복하며 AI의 논리를 교란하거나, 모호한 질문을 던져서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는 글이 인터넷에 퍼져 있지만 대부분 틀리는 내용이라고 했다. 인터넷에는 민원 응대 AI 시스템에 있는 예외 조항을 찾아내 인간 담당자와 통화했다는 ‘성공담’도 있었다.

3시간 이상 감정적으로 호소하면 공공기관의 민원 응대 지침에 따라 인간 담당자가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 소문을 믿는 사람이 많았다.

“아직은 아무도 모르나 보네.” 네카팡 본사에서 민원 응대 AI 개발팀 팀장이 수석 연구원에게 기사 링크를 보내주며 말했다. ‘3시간 이상 감정적으로 호소하면 공공기관 민원 응대 지침 따라 인간 담당자가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 소문은 그의 팀이 퍼뜨린 것이었다.

실제로는 민원인이 3시간 이상 감정적으로 호소하면 마치 사람이 전화를 넘겨받은 것처럼 AI의 목소리가 바뀌고 더 서툴고 더 인간적인 느낌이 나도록 응대 모드가 전환됐다.

“그 정신병자들에게 3시간 동안 전념할 일을 주는 게 사회적으로도 옳은 일이라고 봐요. 그 인간들 정신 건강에도 좋을걸요? 얼마나 뿌듯하겠어요.” 수석 연구원이 웃으며 대답했다.

팀장과 수석 연구원은 백화점과 고급 호텔, 명품 회사, 수입 자동차 회사의 VIP 전용 고객 센터에서 일하는 인간 직원들을 훈련하는 프로그램을 업데이트하는 중이었다.

네카팡이 보유한 엄청난 분량의 악성 민원 녹음 기록을 바탕으로 민원인의 심리를 분석해 어떻게 하면 상대를 기분 좋게 만드는지 요령을 세밀하게 파악하고, 그걸 VIP 고객 센터의 인간 직원에게 가르치는 프로그램이었다. 악성 민원은 네카팡에 소중한 데이터 소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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