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돈이 필요합니다. 이사 비용 2백만 원이 현금으로 필요한데 수중에는 돈이 없습니다. 이미 금융기관을 통한 대출은 받을 대로 받은 상황이라 추가 대출은 어렵고, 주변에 도움을 구할 곳도 없는 상황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 놓였다면 어떤 방법을 찾으시겠습니까?
실제 이 상황에 놓였던 이현동 씨(가명, 자영업자)는 가전제품을 구매했습니다. 그것도 냉장고 2대, 김치냉장고 1대, 총 3대나 말입니다. 당장 이사 갈 비용도 없어 전전긍긍하던 상황인데 왜 가전제품을 구매한 걸까요? 사실 현동 씨는 가전제품을 구매하는데 돈을 한 푼도 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필요하던 2백만 원도 챙겼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현동 씨는 국내 한 대형 가전 회사와 가전제품 '구독 계약'을 맺었습니다. 한 번에 목돈을 내고 제품을 구매한 것이 아니라, 6년에 걸쳐 매달 얼마씩 내겠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은 겁니다. 그런데 계약은 현동 씨가 직접 하지 않았습니다. '가전을 계약하면 2백만 원을 벌게 해 주겠다'는 전화를 걸어온 사람, 얼굴도 보지 못한 그 사람에게 몇 가지 개인 정보를 넘겨줬더니 어느새 냉장고 3대가 계약됐고, 계좌로는 2백만 원이 입금된 겁니다.
언뜻 보면 솔깃한 거래. 하지만 현동 씨는 당장 필요했던 2백만 원을 구하는 덴 성공했지만 자기도 모르는 새 '사기 범죄 공모자'가 됐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론 총 3대의 가전제품을 구독하는 대가로 매달 17만 원을 6년 간 내야하는 채무자가 됐습니다. 계산하면 총 1,224만 원. 결국 2백만 원을 빌리려고 1,200만 원 넘게 내야 하는, 웬만한 불법 사채보다 더한 '고금리 대출'을 한 셈입니다. 냉장고, 김치냉장고 실제 쓰기라도 하면 다행인데 현동 씨는 이 제품들을 만져보지도 못했습니다.
불법 대출 사기의 새 타깃 된 '가전 구독' 시장 가전 구독. 요즘 가전 업계에서 가장 핫한 서비스입니다. 냉장고 에어컨 등 가전제품들은 구매하려면 몇 백만 원의 목돈이 들기도 하는데요. '가전 구독' 서비스는 이렇게 한 번에 목돈을 들이지 않고 매달 얼마씩의 비용을 내고 빌려서 쓸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서비스입니다.
과거에는 '렌털'이라고 주로 불렸습니다. 가정집보다는 사업장에서, 가전 제조 회사와 직접 거래가 아닌 중간에 렌털 회사를 끼고 빌려 쓰는 형태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가전 구독은 일반 소비자가 가전 회사와 직접 '구독 계약'을 맺고 빌려 쓰는 형식입니다. 국내에서는 LG전자가 가전 구독 시장의 선두주자인데, 지난해 구독 사업 매출만 2조 원을 기록했습니다. 삼성전자도 부랴부랴 구독 사업 비중을 늘려가는 모양새입니다.
이런 가전 구독은 일명 'BNPL' 시스템을 기반으로 합니다. Buy now, pay later. 즉 먼저 구매하고 지불은 나중에 하는 '후불결제방식'인데요. 냉장고나 에어컨 등 가전을 몇 년 간 구독하겠다고 회사와 계약을 맺은 후 -> 제품을 먼저 배송받고 -> 이후 매달 얼마씩의 돈을 내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신용카드의 할부 결제와 비슷한 방식이지만 수수료가 따로 발생하지는 않고, 대신 중간에 해지할 경우 위약금 등을 물 수는 있습니다.
현재 국내 가전회사들의 구독 서비스 계약은 간단한 신용조회만 거치면 대부분 계약이 가능합니다. 제품별로 신용등급 기준은 다른데 대체로 6등급 이상이면 무난히 통과됩니다. 이 계약자가 정말로 매달 구독료를 낼 수 있는지 확인하거나 이를 위한 증빙 등 별도의 절차는 요구하지 않습니다. 계약 정보와 실제 구매자가 일치하는지 본인 확인 절차도 사실상 없습니다. 온라인이나 유선으로 구독을 하는 경우는 더 그렇습니다. 현동 씨가 '미지의 남성'을 통해 가전제품 3대를 순식간에 구독할 수 있던 배경도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이 인터넷에서 구매한 '미사용 새 제품'의 비밀 현동 씨가 미지의 남성에게 가전 구독을 제안하는 전화를 받은 건 지난해 11월이었습니다. 그때 당시 인터넷에 '소액 대출' '급전 대출'을 많이 검색해 보던 현동 씨가 인터넷에 '소액 대출이 가능하다'는 글을 보고 전화번호를 남겼는데, 그 번호를 보고 연락을 해온 겁니다. 이런 식의 대출을 '내구제 대출'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금융기관에서 정식 대출이 안 되는 사람들이 '나를 스스로 구제하는 대출'이라는 뜻인데, 한마디로 불법 대출, 사기입니다. (대부업법이 정의하는 '대출'의 개념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현동 씨는 취재진에게 "내가 가전회사에 매달 돈을 갚으면 문제가 될 것이 없지 않냐"고 되물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동 씨는 가전제품을 매개로 한 불법 대출 사기범죄에 가담한 '공범'입니다.
현동 씨에게 전화를 건 '미지의 남성'과 같은 사람들은 불법 대출업자, 쉽게 말해 '사기꾼'입니다. 이들은 가전제품을 구독 계약하게 한 후 해당 제품을 자신들이 지정한 주소로 배송하게 합니다. 그렇게 확보한 가전제품을 인터넷 판매상들에게 팔아넘깁니다. 인터넷 가전 판매상들은 주로 중고 사이트를 통해 '미사용 새 제품'이라며 정가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가전제품을 파는데, 이 판매상들에게 '구독 계약'한 가전을 넘기는 겁니다.
판매상들은 또 이 가전을 살 소비자를 물색합니다. 중고 사이트에 불법 대출업자들이 제공한 가전제품의 품번 등을 공개하며 '이런 가전을 확보하고 있다'고 홍보하는 겁니다. 조금 더 저렴하게 가전제품을 사고 싶은 사람들이 연락을 해옵니다. 거래가 성사되면, 가전제품은 인터넷 판매상에게 물건을 산 소비자의 주소지로 다시 배송이 됩니다.
취재진이 접촉한 인터넷 가전 판매상들에 따르면, 그들은 정가보다 30% 정도 저렴하게 물건을 판다고 했습니다. '소비자 입장에선 '싸게 잘 산 거 아닌가' 싶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싸게 산 새 제품이라고 믿은 가전제품은 누군가의 이름으로 계약된, 사기 범죄에 연루된 '장물'입니다. 게다가 최종 소비자의 구매로 인해 이 물건을 융통한 불법대출업자, 판매상 들은 이득을 얻습니다. 사실상 '꽁'으로 얻은 물건을 팔고 또 되팔며 이득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00만 원짜리 냉장고라고 하면 대출업자들은 그 제품 구매한 사람(구독 계약한 사람)에게 70만 원 정도 줘요. 그걸 우리에게 150만 원 정도에 넘겨요. 그럼 우리는 그걸 소비자들에게 240만 원 정도에 판매를 합니다." (경기도 소재 인터넷 가전 판매상)
그들은 취약계층의 '간절함'을 노렸다 취재진은 이런 불법 대출 사기를 벌이는 한 조직을 추적했습니다. 일명 '배불뚝이'라고 불렸던 불법 대출업자 A 씨. 그는 급하게 돈이 필요한 취약계층이나 청년들에게 접근해 가전 제품 구독을 부추겼습니다. 취재진이 만난 20대 청년 3명은 모두 A 씨의 지령에 따라 적게는 6대, 많게는 20여 대의 가전제품을 A 씨에게 넘겼습니다.
지령은 철저히 비대면으로 이뤄졌습니다. 카카오톡 등으로 '어느 매장에 가서, 어떤 것을 구매하고, 품번을 정확히 외워 가라'는 구체적인 시나리오였습니다. 가전 판매점의 의심을 사지 않게 '부모님에게 선물을 한다고 해라, 결혼을 해서 혼수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해라'는 둥 연기까지 시켰습니다.
A 씨에게 이런 청년들을 연결시켜준 건 모집책들입니다. 모집책 B 씨 등 3명은 지인을 통해, 혹은 SNS나 채팅방 등을 통해 '돈을 벌게 해 주겠다'며 청년들을 모집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약속했던 '돈'은 청년들의 손에 쥐어지지 않았습니다. 차일피일 미루며 돈을 주지 않았고 대신 더 많은 가전 구독을 요구하거나, 다른 종류의 사기 범죄에 가담하라고도 했습니다.
뭔가 잘못된 걸 알았을 땐 이미 그들에게 자신의 개인 정보와 금융 정보가 모두 넘어간 이후였다고 합니다. 범죄에 필요한 명의 정보를 확보한 이들은 돌변했고, 폭행과 협박까지 하며 무리한 요구를 이어갔습니다. 서류를 조작해 전세 대출을 받게 하는 작업 대출을 시키거나, 신용 카드를 빼앗아 카드 한도 최대 금액으로 골드바를 구매해 갈취하거나, 더 이상 돈이 나올 구멍이 없어 보이면 또 다른 희생양을 찾는 일에 가담시켰습니다.
20대 한 여성은 이들에게 끌려가 강제로 문신까지 당했습니다. '꽃뱀'이라며 어깨부터 가슴까지 꽃과 뱀을 그려 넣었다고 합니다. 문신을 한 이유는 황당합니다. "자신이 문신 기술을 배웠는데 이를 연습할 도화지가 필요하다고 했다"는 게 피해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청년들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빚이 남은 것을 물론 회복하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까지 남았습니다.
휴대폰에서 가전까지...진화하는 불법 대출 사기 사실 가전이 처음은 아닙니다. 휴대폰을 약정 개통한 후 단말기를 넘기면 돈을 주는 일명 '휴대폰 깡'도 품목만 다를 뿐 앞서 설명한 '가전 구독' 사기와 방식은 똑같습니다. '휴대폰 깡'이 처음 등장한 게 2000년대 초반이니까 이런 방식의 불법 대출 사기가 활개 친 지도 20년이 넘었습니다. '휴대폰 깡'의 경우는 넘긴 휴대폰이 범죄에 이용되는 대포폰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전기통신사업법'으로 이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전을 이용한 범죄는 전기통신사업법의 규제 대상이 안 됩니다.
'내구제 대출'이라는 불법 대출을 제재하는 큰 범주의 금융 제재는 현재로선 없습니다. 그 이유는 현행 대부업상 '대부'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금감원 관계자는 기자와 통화에서 "대부라는 것은 일정 기간을 두고서 미래에 금전을 돌려받는 걸 전제로 금전을 교부해야 되는 것인데, 이런 '내구제 대출'이라 불리는 거래는 상품을 주고 돈을 받는 것이라 '대부'에 해당하지 않는다. 신고가 들어오면 빠르게 수사기관으로 연계하는 방안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금융 당국이 이런 인식을 갖고 있는 큰 배경엔 2019년 대법원 판례가 있습니다. 대법원은 당시 판결에서, 서민들이 급전 대출을 목적으로 활용하는 '휴대폰 깡'은 대부업법 위반으로 볼 수 없다며 해당 행위에 대해 무죄를 확정한 바 있습니다. 이후 앞서 언급한 전기통신사업법 규정이 만들어지며 휴대폰깡은 처벌할 근거가 생겼지만, 다른 종류의 내구제 대출 행위 자체는 현재 법으로 제재할 근거가 없습니다.
정부 차원의 이른 내구제 대출 실태조사나 통계도 없습니다. 유일한 통계는 금감원 불법사금융신고센터에 접수된 내구제 대출 상담 신고 건수인데, 2023년 106건, 2024년 135건에 불과합니다. 취재진이 추적했던 배불뚝이 A 씨에게 가전을 넘긴 걸로 추정되는 가담자만 110여 명인 걸 감안하면 이 통계가 실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는 못하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