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전 남아공 사례가 2025년 한국에 주는 교훈

김민수 2025. 3. 31.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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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데즈먼드 투투의 <용서 없이 미래 없다>

[김민수 기자]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말 속의 '모든 것'에는 나와 견해가 다른 이들도 포함된다. 그런 이들과 연결되어 있으니 내 삶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이후, 이토록 마음이 불편한 것도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때문일 것이다. 그 불편함을 가중시키는 것은 가해자와 동조자들의 뻔뻔함이다. 자기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일이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일일까? 어렵겠지 싶기도 하다.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용서를 구하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이 아닌가? 너도나도 잘못이 없다고 우기는 것 외에는,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 외에는 살아날 길이 없으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합리화'를 하고, 반대편은 또한 그것을 밝혀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아닌가?

'정의' 혹은 '진실'이라는 말이 공허한 것만 같다. 2024년 12월 3일, 느닷없는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군인들이 동원되어 나라를 혼란에 빠트렸는데, 그 잘잘못을 가린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도대체 헌법재판소는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 것일까? 한덕수 국무총리 탄핵과 관련해서 '위법하지만 탄핵할 정도는 아니다'라고 함으로써 '위법을 저질러도 되는 이상한 법치국가'를 만들어 놓았다고 본다. 혹 윤석열에 대해서도 이상한 논리를 내세워 '위법했지만, 탄핵할 정도는 아니다'라 결론 내리고 싶은 것인가?

화해할 수 없을 듯한 내란세력, 동조세력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그들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삶을 뒤흔들어 놓는다는 것에 화가 난다.

복잡한 마음으로 읽은 책... 데즈먼드 투투는 어떤 인물인가

이런 마음으로 복잡한 시점에 데즈먼드 투투의 <용서 없이 미래 없다>라는 책을 읽었다.
▲ 용서 없이 미래 없다 저자 : 데즈먼드 투투 / 출판사 : 사자와 어린양 / 2022년 10월 14일 초판 1쇄 / 가격 20,000원
ⓒ 사자와어린양
투투는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백인 우월주의)에 대항해 싸운 화해와 평화의 사도로 알려졌으며, 198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투투는 남아공에 사는 다양한 종족과 인종 안에 존재하는 차이의 아름다움을 묘사할 때 흔히 사용되는 유명한 '무지개 국가(Rainbow Nation)'이라는 표현을 창안한 인물이기도 하다.

투투는 1995년 진실화해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TRC= 이하 TRC)의장으로 활동했다.

<용서 없이 미래 없다>라는 책은 그가 TRC의장으로 활동하며 아파르트헤이트의 파괴적인 범죄와 피해자들을 어떻게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도록 이끌었는지에 대한 일종의 보고서다.

물론, TRC의 한계 또한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뒤른베르크 재판(2차 대전 후, 나치 독일 전범을 처벌하기 위한 국제 군사재판)의 패러다임과는 다른 방향에서 남아공의 아픈 상처를 치유했고, 2025년 현재까지도 남아공의 긍정적인 미래가능성을 열어놓은 단초가 되었다. 진영 논리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에 시사점이 많은 책이라고 여겨진다.

용서를 향한 제3의 길

TRC에서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고, 가해자에 해당하는 이들이 사면신청을 요청하면서 범죄와 관련된 사항을 모두 털어놓으면 그 대가로 사면을 베푸는 방식을 사용했다. 자기의 잘못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처벌 없이 사면될 수 있는 것인지, 피해자의 헌법적 권리는 어찌되는 것인지에 대한 비판도 있었단다.

하지만, 이런 방식을 통해서 영원히 묻혀버릴 수 있었던 아파르트헤이트의 만행이 드러났고, 가해자들의 범행실토로 미제에 묻혔던 사건들이 해결되기도 하면서 피해자들도 위로를 받고, 가해자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길이 열렸다.

예를 들면, 아파르트헤이트의 만행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피해자가 증언을 하며, 그에 가담했던 가해자가 사건의 전모를 털어놓는 것이다. 여전히 재판에 반대하고 진실 규명에 반대하며 '과거는 과거로 흘려보내자'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사면을 원하는 범죄자가, 사면의 대상이 되는 죄목이 무엇인지도 모르도록 덮어두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말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과거는 그냥 사라져 버리거나 얌전히 누워 있기는커녕 당혹스럽고 끈질기게 되돌아와 우리를 괴롭힌다. 우리가 그 야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 한, 그 놈은 어김없이 되돌아와 우리를 볼모로 삼는다(pp.55,56)."

그렇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과거를 반복하기 마련(조지 산타야나)'이고,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은 그것을 반복하는 운명에 처한다.'는 말은 진리에 가깝다. 그럼 점에서 TRC의 가해자 사면방식은 기억되지 않고 묻힐 수 있었던 과거, 그리하여 반복될 수 있는 운명을 거부하는 방식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우분투(Ubuntu), 보토(boto), 제3의 길
▲ 헌법재판소에 내리는 눈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를 앞두고 논의를 이어가고 있는 30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 눈이 내리고 있다.
ⓒ 연합뉴스
'우분투(Ubuntu)'는 응구니족 언어로 "내가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며 소토족 언어로는 '보토(boto)'라고도 하나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만 사람이 된다'는 의미로 타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 인간의 존엄성을 핵심으로 하는 아프리카 세례관의 핵심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단어다.

TRC에서 이 세 가지 개념을 제시한 이유는, 극단적인 대립을 넘어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려는 철학적 시도였다. 아프리카 전통에서 인간 중심적 사상을 제시하고, 제3의 정치, 경제체제의 균형을 이루려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1994년 넬슨 만델라가 첫 민주주의 선거로 대통령이 된 이후에 가해자들을 용서함으로써 화해를 이룰 수 있었다(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우분투 정신에서 남아공은 재건하고 회복할 힘을 얻었으며, 2013년 만델라 사후에도 만델라 사후에도 우분투 정신을 이어받아 사회적 통합과 민주주의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물론 남아공은 여전히 정치적, 경제적 도전에 직면해 있으며,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나라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우분투, 보토, 제3의 길의 정신은 현대사회에서도 중요한 가치로 작용할 것이며, 탄핵정국 이후 대한민국도 이런 가치들을 통해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승자독식의 세상에서 우분투 정신으로 산다는 것

대한민국은 각자도생, 승자독식의 세상에 길들여져 살아가고 있다. 코로나 19이후 이 현상은 심화되었으며, 비상계엄 사태 이후에는 진영논리까지 더해지면서 차별과 혐오, 반대진영에 대한 무조건적인 공격과 반대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에 '우분투'는 없고 진영논리만 판치는 것은 아닌가? 과연, 이것이 우리의 미래에 긍정적으로 작용할까?

P.W. 보타(P.W. Botha)는, 1978년부터 1989년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을 지낸 인물로서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정책) 체제'를 강력하게 유지하려 했던 인물이다. 그에 대한 투투의 법정 증언의 일부를 들어보자.

"판사님, 저는 피고인에게 호소하고 싶습니다. 저는 그에게 이 법정에서 제공하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호소하고 싶습니다......보타 씨가 '내 정부의 정책들이 여러분에게 고통을 주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는 '내 정부의 정책들이 여러분에게 너무나도 많은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대단한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P.W. 보타는 그 호소에 분노를 드러냈으며, 결국 사소한 절차상의 문제로 무죄 방면되었다. 과거 그가 집권할 때 그의 호의(?)를 입었던 재판관들이 당시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정책을 옹호하며, 사과를 거부하다가 2006년 사망했다. 그래서 그는 행복했을까?
▲ 헌재 앞 경찰 차벽에 막힌 시민들 29일 오후 서울 광화문 동십자각 앞에서 열린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17차 범시민대행진 참가자들이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탄핵 선고 지연에 분노를 표하며 헌법재판소를 향해 행진하다 경찰 차벽에 막혀 있다.
ⓒ 남소연
책을 읽는 내내 '우분투의 정신이 대한민국에서도 가능한 것일까?'를 고민했다. 'TRC의 방식이 한국에서 실질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가?'하는 생각도 했다.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란 세력과 동조세력들이 용서를 구할 가능성도 희박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범죄사실에 대해 법적으로 분명한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분투 정신은 여전히 현대 사회에서도 중요한 가치라는 것. 개인주의, 각자도생, 승자독식의 세상에서도 상호 존중과 배려를 통해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은 기억했으면 좋겠다.

쉽지 않은 일이다. 가해자가 여전히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피해자인 국민에게 오히려 용서를 강요한다면 그런 용서와 화해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와 책임 있는 태도, 피해자의 자율적인 선택이 충족될 때 사회적 정의도 회복될 것이다.

데즈먼드 투투의 <용서 없이 미래 없다>라는 책은 탄핵정국으로 혼란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탄핵이후의 삶이 어떠해야 할지를 제시하고 있다. 지금, 탄핵정국에서 꼭 읽고 고민해봐야할 책이라 생각되어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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