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엔 해고가 없다…삼성도 TSMC도 '을'로 만든 이 회사[김현예의 톡톡일본]
세계 반도체 시장을 둘러싼 패권 전쟁 속, 조용히 몸집을 불려나가고 있는 거인(巨人)이 있다. 올해로 설립 62년을 맞은 반도체 장비회사 도쿄일렉트론이다. 지난 10년 새 매출 4배, 영업이익은 8배나 불린 도쿄일렉트론은 반도체 시장에서의 ‘수퍼 을(乙)’로 불린다. 삼성전자도, 대만을 대표하는 TSMC도 이 회사의 장비 없인 단 하나의 반도체도 제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쿄일렉트론이 올해 매출과 영업이익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기도 하다. 지난 11일 도쿄 아카사카(赤坂) 본사에서 가와이 도시키(河合利樹·61) 도쿄일렉트론 최고경영자(CEO)를 만나 반도체 시장 전망과 도쿄일렉트론의 성장 비결을 들어봤다.
이야기는 반도체 시장을 달구고 있는 AI(인공지능) 산업으로 시작했다. 가와이 사장은 현재 AI 산업이 “인간으로 치면 유아기에서 청소년기로 접어들었다”고 했다. 지난 10년간 AI 산업이 싹을 틔웠고, 지금은 두 번째 단계에 접어든 상태란 것이다. 그는 “지금은 AI, AR(증강현실),VR(가상현실), 자율주행 등 기술이 이끌어 가는 시대가 됐다”며 “반도체 시장은 올해 6000억 달러(약 873조원)를 넘어 2030년엔 1조 달러(약 1455조원)를 돌파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것이 끝이 아니라 세 번째 웨이브가 온다”고도 했다. “양자컴퓨팅, 6G와 7G의 초고속 데이터 송·수신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며 “오는 2050년까지 반도체 시장은 지금의 10배 수준까지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어떻게 미래 대비를 하고 있냐는 말에 설명이 이어졌다. “반도체는 시장 변화가 빨라 기술 혁신이 중요하다. 세계 최고의 기술 혁신력을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하고 있다. 도쿄일렉트론의 가장 큰 강점은 기술이다. 반도체 제조 장비 업계에서 세계 최대인 2만3000건 이상의 특허(IP)를 보유하고 있다. 강력한 기술력을 위해 5년간(2029년 회계년도까지) 1조5000억엔(약 14조8000억원) 이상의 연구·개발(R&D) 투자, 7000억엔(약 7조원)의 설비 투자를 진행한다. 매년 약 2000명의 인재도 고용하고 있다. 앞으로 3조엔(약 29조4000억원) 이상의 매출, 35% 이상의 영업이익 달성을 중기경영계획 목표로 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에선 “도쿄일렉트론이 없으면 반도체 생산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할 정도로 도쿄일렉트론은 업계 최강자다. 예컨대 반도체 제조의 핵심 공정 중 하나인 반도체 ‘도면’ 그리기에 해당하는 노광 공정만 해도, 도쿄일렉트론의 극자외선(EUV) 노광용 도포·현상 장치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다. 세계 시장 점유율이 100%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다. 세척이나 박막, 현상, 에칭 등 중요한 공정에서도 이 회사의 시장 점유율은 1~2위를 오간다. 도쿄일렉트론이 전체 반도체 제조 장비 시장에서 세계 4위에 올라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반도체 장비 시장의 강자는 아니었다. 1963년 회사가 설립됐을 때만 해도 도쿄일렉트론은 기술전문 상사였다. 회사 창립자가 미래를 내다보고 당시에 미국서 반도체 검사 장비를 미국에서 수입한 것이 반도체 장비 사업의 시작이었다. 일본에 제대로 된 반도체가 없던 시절, 검사 장비를 수입한다는 건 당시로선 도전이었다. 장비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밤낮없이 뛰어들며 기술력을 쌓기 시작했다. 일본 반도체의 약진과 함께 급성장해, 해외 진출에 속도를 내면서 반도체 장비 시장의 강자로 올라섰다.
성장 비결을 묻자 주저 없이 “사람”이란 답이 돌아왔다. “성과는 인재의 능력과 동기 부여에 달려있다. 능력 있는 인재를 채용하고, 동기를 부여하면 이직률, 이탈률이 낮아진다. 일본에 있어서의 도쿄일렉트론 이직률은 1.0%다. 젊은 세대, 경험 많은 세대도 모두 일할 수 있는 건강한 환경을 만들고 있다. 도쿄에서 일하든 이와테현에서 일하든 동일한 급여를 준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도쿄일렉트론엔 해고는 없다. 인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기업 실적이 악화해 직원을 해고하게 된다면 추후 실적이 반등해도 인력 부족 상황에 대처할 수 없지 않나.”
어떤 인재상을 바라느냐는 말에 가와이 사장은 “다양한 인재를 필요로 하고 있다”며 자신의 얘기를 꺼내 들었다. 1963년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난 그는 메이지(明治)대 경영학과 졸업했다. 그가 도쿄일렉트론과 인연을 맺게 된 건 1986년. 대학에서 골프부 활동에 푹 빠져있을 때였는데, 어느 날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체력 좋은 학생을 구하는 회사가 있다”는 것이었다. 한때 가업을 이을까도 생각했지만, 입사를 결심했다. 그는 “사장이 되리라고는 꿈꾸지도 않았다”며 입사 초년병 시절 이야기를 전했다. 입사 후 그가 목표로 삼은 것은 ‘1인분’의 몫을 다하는 것이었다. 반도체 전문 용어는 물론이고 반도체 장비 영업은 낯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고객에게도, 공장에도, 조직에도 폐를 끼치지 말자”고 다짐했다.
반도체 지식이 거의 없던 그가 생존할 수 있었던 배경엔 고객과 서비스팀, 공장 설계 부서 등 다양한 사람들과의 ‘소통’이 있었다. 그는 “반도체 비즈니스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마케팅과 제품기획, 개발, 제조, 납품, 설치, 애프터서비스까지 모든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소통과 신뢰”라고 했다. 그는 “혼자서 다 하려 한다면 안 된다. 목표는 높게 설정하고 소통과 협업을 통해 목표를 이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패를 대하는 자세도 달랐다. 그는 “실패는 당연히 허용된다. 실패를 통해 얻은 교훈을 향후 발전에 적용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가와이 사장은 “앞으로 한국 고객과 강력한 커뮤니케이션과 협력을 통해 반도체 산업 및 한국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도쿄=김현예 특파원 hykim@joong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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