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유아까지 사교육 ‘중독’…“사교육 카르텔 엄단”? 학부모는 믿지 않았다
[주간경향] “딱 100만원씩 더 들었어요.”
세종특별자치시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최지연씨(45) 가족은 지난 겨울방학 때 평소보다 100만원 더 많은 월 200만원을 학원비로 지출했다.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한 큰아이가 입시제도가 바뀌는 2028년 대학입시를 치르게 되는 데다, 둘째를 외국어고나 자율형사립고에 보내기로 하면서다. 최씨는 “어느 학원은 수능이 더 중요해질 거라 하고, 또 어디는 학교 활동이 더 중요해진다고 하는데 누구 말이 맞는지 몰라 일단 뭐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특강 신청) 마감도 너무 빨라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고 말했다.
사교육비 폭증세가 예사롭지 않다. 학령인구가 줄고 있음에도 전체 사교육비가 늘었고, 사교육 참여율과 참여 시간도 증가했다. ‘킬러문항’ 배제와 사교육 카르텔 타파를 앞세워 사교육을 잡겠다던 정부의 호언장담과는 정반대의 결과다. 학벌 중심 경쟁시스템이라는 본질적 문제가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정책 참여자와의 숙의 없이 일단 ‘지르고 보는’ 윤석열표 국정운영이 현장의 혼란을 더 부추겼다는 지적이 나온다.
■초등학생·영유아까지 사교육 ‘중독’
지난 3월 13일 통계청이 내놓은 ‘2024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 결과’ 자료를 보면 지난해 사교육비 총액은 29조2000억원으로 1년 전보다 2조1000억원(7.7%) 증가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저효과로 2021년 21%까지 치솟았던 사교육비 증가율은 2022년 10.8%를 지나 2022년 3.5%로 평년 수준으로 낮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지난해 다시 연간 물가상승률의 3배가 넘게 치솟았다.
초중고 전학교급, 전학년에서 모두 사교육비가 늘어난 가운데 특히 초등학생의 사교육비 급증이 도드라졌다. 초중고 전체 학생 수는 2023년 521만명에서 지난해 513만으로 1.5% 줄었는데, 초등학생의 경우 2023년 260만명에서 지난해 250만명으로 1년새 10만명이나 급감했다.
초중고별 사교육비 증가율 순으로는 초등학교 6.5%, 중학교 9.5%, 고등학교 8.1%로 초등학교의 사교육비 증가율이 꼴찌다. 하지만 전년 대비 1인당 사교육비 증가율을 따져보면 초등학생 11.1%, 중학생 9%, 고등학생 5.8%로 초등학생 홀로 두 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했다.
올해 처음 공개된 교육부의 ‘유아 사교육비 시험조사’ 결과에서는 영유아에 대한 우리 사회 사교육 중독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6세 미만 영유아의 사교육 참여율은 무려 47.6%로 집계됐는데, 초등학교 입학 직전인 5세에는 사교육 참여율이 81.2%까지 높아졌다.
아이는 적게 낳지만 대신 자원을 집중해 소수의 자녀에 올인하는 경향이 고착화되는 양상이다. 유명 영어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어린이들이 영어 사교육에 매달리는 이른바 ‘7세 고시’도 이 같은 현상과 맞닿아 있다. 앞선 교육부 조사에 따르면 3시간 이상(반일제) 영어유치원의 월평균 비용은 154만5000원이다. 이를 연간으로 환산하면 교육부가 조사한 4년제 대학 평균 등록금(682만원)의 2배가 넘는다.
교원단체들은 윤석열 정부가 3년간 겉으로는 사교육 카르텔 타파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경쟁과 사교육을 부추기는 모순적인 정책으로 사교육 시장이 더 과열되도록 부채질했다고 입을 모은다.
최선정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대변인은 “(사교육비 역대 최대치는) 정부가 대책 없이 교육발전특구를 확대하고, 자사고와 외고를 부활시키는 등 특권학교를 늘리는 정책을 펴면서 오히려 사교육을 조장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현 정부는 앞서 2023년 6월 내놓은 ‘공교육 경쟁력 제고 방안’에서 전 정부 결정을 뒤집고 자사고와 외고, 국제고를 유지하기로 했는데, 결과적으로 이 결정이 사회 전반적인 경쟁 분위기 고조, 고교 입시 강화를 거쳐 사교육비 증가를 견인했다는 설명이다.
■대통령의 말이 흔든 입시 현장
교육전문가나 수요층과의 숙의 없이 즉흥적으로 쏟아진 대통령발 교육정책도 사교육비 급증에 일조했다.
당장 대통령의 입에서 출발한 의대 2000명 증원은 전국적으로 ‘의대 진학 광풍’을 불러일으키면서 상위권 학생들의 사교육 심리를 자극했고, ‘초등 의대반’ 등 영유아층과 초등학생까지 겨냥한 사교육 상품이 생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실제로 의대 증원으로 상위권 경쟁압력이 증가하면서 고등학교 상위 10% 학생의 사교육 참여율은 2023년 감소세에서 지난해 증가세로 돌아섰다.
과도한 사교육 의존 타파를 위한 ‘킬러문항’ 배제도 현장에서는 난이도 하락보다 변화에 더 방점이 찍혔다는 분석이 적지 않다. 한 입시업계 관계자는 “킬러문항이 나오지 않는다면 대신 어떤 식의 문제가 수능에 나올 것인가에 대한 정보가 수험생들에게 없었다”며 “불안감 때문에 준킬러문항 대비 등 사교육에 더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고, 결국 대비한 이들이 수혜를 봤다”고 말했다.
문제는 지금도 심각한 사교육비 문제가 더 이상 교육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사회 이슈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해 7월 현재 수준의 합계출산율을 유지할 경우 2083년 한국 인구가 지금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측했는데, 주거비와 함께 높은 사교육비를 낮은 출생률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했다. 김태훈 경희대 교수(경제학)의 ‘사교육비 지출 증가가 출산율에 미치는 영향’ 연구를 보면 학생 1명당 사교육비가 1% 늘면 다음 해 합계출산율은 최대 0.262% 감소했다. 사교육비가 지금처럼 치솟는 상황을 감안하면 OECD의 전망조차 낙관적일 수 있다는 얘기다.
사교육의 개입으로 교육을 통한 사회계층이동 기능이 갈수록 희석되는 것도 문제다. 이번 조사에서 월소득 ‘800만원 이상’인 가구와 ‘300만원 미만’인 가구의 사교육비 지출 차이는 3.3배였다. ‘800만원 이상’인 경우 전년 대비 증가율이 제자리걸음(0.8%)을 하고, ‘300만원 미만’ 가구에선 12.3%나 늘어났음에도 1인당 50만원 가까이 사교육비가 차이 났다. 이동사다리 역할을 해야 할 교육의 기능이 사교육으로 희석되고 있는 것으로, 사교육 격차 좁히기가 과도한 지출로 이어지면서 ‘에듀푸어’(과도한 교육 지출로 빈곤 상황에 처하는 계층) 문제까지 불거지고 있다.
구본창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대안연구소장은 “정부가 사교육 경감, 경쟁 교육 완화를 외치지만 학부모들은 경험을 통해 정부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했다”며 “고교서열화는 유지하고 대입 상대평가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우리도 빨리, 더 많은 사교육비를 준비하자’는 식으로 대응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교육 문제는 더 이상 교육이 아니라 초저출생, 지역소멸 같은 국가소멸의 문제”라며 “국가 철학과 비전 설계, 정책 목표 모두 교육개혁을 통한 사회적 난제 해결로 방향을 잡고 실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호준 기자 hjlee@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문형배 결론 안내고 퇴임설’ 자체 확산 중인 국힘···탄핵 기각 여론전 펴나
- 덕지덕지 붙은 방염포···‘미스터 션샤인’ 만휴정, 간신히 화마 피했다
- “백종원이 너무 욕심부렸어”…손님 줄어 뒤숭숭한 예산시장
- “윤 대통령 탄핵도 기각, 10 대 0 콜드게임 눈앞”···한덕수 기각에 고무된 국힘
- “딸이 숨을 안 쉰다”···아버지가 파출소로 뛰어들자 경찰들이 살렸다
- [단독]방첩사 간부 “여론조사 꽃 스스로 안 갔다”…윤석열 지시 부인은 거짓말
- [속보]안동2·청송3·영양6·영덕7명···경북 북부 산불 사망 18명으로 늘어
- [속보]경북 산불로 차도 열차도 멈춰···중앙·동해선 철도, 서산영덕·중앙고속도 통제
- [속보]전농 트랙터 1대 서울 도심 진입···경찰, 견인 시도 중
- [속보]경북 북동부 산불로 중앙고속도로·지방도 곳곳 통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