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에겐 ‘콩글리시’도 높은벽… 영어 눈뜨자 세계에 자신의 삶 알려”[M 인터뷰]

조율 기자 2025. 3. 19.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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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 인터뷰
12년째 탈북민 영어교육… 라티그·이은구 ‘FSI’ 공동대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영어교육”
한 탈북민 작은 요청에서 시작
최소한의 영어, 韓정착 위한것
자신감 생긴 탈북민 새 도전도
北인권·인신매매 알리기 나서
영국·스위스 국제 무대 이어
하버드대서 말하기 대회까지
언젠가 ‘北 지점’ 만들기 꿈꿔
13일 프리덤스피커즈인터내셔널(FSI) 공동대표 이은구(왼쪽) 씨와 케이시 라티그 씨가 서울 마포구 FSI 사무실에서 탈북민에 대한 영어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윤성호 기자

강제북송, 인신매매, 이산가족….

‘탈북민’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연관되는 단어들이다. 통일부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3만4314명의 탈북민이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탈북민은 북한 인권 문제와 함께 자주 언급되지만 이들이 탈북 이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은 크지 않다. 관련 정책 또한 이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에 집중돼 있다. 이와 달리 교육적 지원을 통해 이들의 사회적 정착을 돕는 단체가 있다. 12년째 탈북민들을 대상으로 영어교육 사업을 하고 있는 비영리 민간단체 ‘프리덤스피커즈인터내셔널(FSI)’이다. FSI를 운영하고 있는 케이시 라티그·이은구 공동대표를 지난 13일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만났다.

―탈북민 지원 단체를 설립하게 된 배경은.

△이은구 = 늘 어떻게 하면 조국에 기여하며 살 수 있을까 고민해왔고, 또 ‘통일’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해왔다. 통일을 위해서는 북한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석사로 북한학을 공부했다. 이후 북한인권정보센터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탈북민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많았다. 당시 식량난에 처한 북한의 실상을 전해 들으며 탈북민들을 구호하는 일에 내 인생을 바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케이시 라티그 = 한국에 오기 전 하버드대에서 교육학을 전공하며 ‘자유’에 큰 관심을 뒀다. 지난 2011년 한국 내 ‘자유기업원’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고, 그러던 중 2012년 탈북민 30여 명이 중국 공안에 붙잡혀 강제북송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저항하기 위해 중국 대사관을 찾는 과정에서 박선영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을 만났고, 그가 당시 운영한 탈북청소년 대안학교 ‘물망초학교’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그때 처음으로 탈북민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북한 인권 문제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이후 한 인권 콘퍼런스에서 이 대표를 만나 인연이 시작됐다.

―왜 영어교육이었나.

△라티그 = 어느 날 한 탈북민이 찾아와 “당신이 하는 일은 참 멋져요. 하지만 북한에 대북전단을 보내는 활동은 한국에 있는 탈북민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요”라며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영어교육”이라고 말했다. 그 한 사람의 작은 요청에서 FSI가 시작됐다.

△이 = 탈북민들은 ‘커피’ ‘버스’ ‘아파트’ 등 우리가 자연스레 사용하는 외래어, 우리가 국어처럼 사용하는 ‘콩글리시’에 대한 지식이 없다. 한국에 왔는데 새로운 단어, 표현이 많으니 적응이 힘든 것이다. 이들의 안정적인 정착을 도우려면 영어교육이 필요하다고 깨달았다. 일각에서는 ‘탈북민이 무슨 영어공부까지 하냐’고 반문하기도 하지만, 영어공부는 탈북민이 한국에서 생존하기 위한 반드시 헤쳐나가야 할 과제다.

―영어교육의 효과는 어땠나?

△이 = 영어 자원봉사자들이 일주일에 한 번 이상 탈북민들과 만나 영어교육을 했다. 영어는 이들이 탈북민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 각자의 꿈을 찾아가는 출발점이 됐다. 더 높은 학교에 도전했고, 해외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가보지 못했던 곳들을 여행하며 견문을 쌓았다. 이 중 일부는 FSI의 도움으로 자신의 경험을 담은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영어 말하기 대회’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탈북민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긍정하고 스스로 치유하기도 했다. 또 직접 외부에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북한 인권 문제를 사회에 더 알릴 수 있다는 기대감, 효능감도 가지게 됐다.

FSI가 출판을 지원한 탈북민들의 영문판 도서들.

―2014년 인도에서의 탈북민 스피치를 시작으로 매년 2회 탈북민 영어 말하기 대회를 열고 있다. 지난해 열린 19회 대회는 하버드대에서 개최, 탈북민 7명이 자신의 삶을 강연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영국, 스위스 등 탈북민들이 스피치를 통해 다양한 국제무대를 밟고 있다.

△라티그 = 하버드대는 저의 모교인 만큼 영어 말하기 대회를 시작한 뒤로 계속 가고 싶었던 곳이지만, 단체 여력상 녹록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어로, 한국에서만 스피치를 한다면 전 세계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2014년 인도에서 개최된 미국의 비영리단체 ‘아틀라스 네트워크’의 ‘아시아 자유포럼’이 영감을 줬다. 이 포럼은 아시아 내 다양한 인권 단체가 한자리에 모여 자유 관련 사회 문제에 대해 소통하고 공유하는 행사다. FSI에도 국제무대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지난해 하버드대 스피치는 하버드대 측에서 단체 활동에 대한 소개를 듣고 먼저 제안한 것이다. 한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로 발표하는 것도 좋지만, 국제 언어인 영어로 할 때 이들의 스피치가 국제적으로 공론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 = 해외에서의 스피치 경험은 탈북민에게도, 그리고 저에게도 색다른 경험이다. 한국에서 스피치를 하면 그 내용이 어떻든 결과적으로 탈북민들을 ‘불쌍하다’고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있다. 하지만 해외 사람들은 탈북민들에게 ‘굉장한 일을 하고 있다’ ‘힘든 과정을 극복해내다니 대단하다’ ‘용감하다’ ‘응원한다’는 반응을 보이며 이들의 삶을 긍정해준다. 이런 긍정적 피드백을 받으며 탈북민들이 느끼는 보람과 효능감이 크다. 우리도 그들이 느끼는 행복감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된다.

―탈북민들이 영어 말하기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이 녹록지 않았을 것 같다. 북한에서 영어교육을 받은 경험도 매우 적었을 것이다.

△라티그 = 북한은 1990년대까지 제2외국어로 러시아어를 배웠다. 현재의 영어교육은 지식 습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적’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교육이다. 이에 탈북민들은 처음 자신의 이야기를 영어로 작성하고, 읽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뿐만 아니라 탈북민들은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밝히고 공개적인 자리에 서는 것을 두려워한다. 혹시나 북한에 있는 자신의 가족이 위험해지지 않을지, 자신의 안위가 위협받지는 않을지까지 걱정돼서다. 이에 마음을 먹고 4∼5년 뒤에야 대회에 참여하는 탈북민도 있다. 하지만 영어 말하기 대회는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이 핵심이다. 영어 실력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집중하는 것은 발음이나 문법, 악센트가 아니라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대본에 잘 담겼느냐’다. 나머지는 우리가 충분히 도울 수 있는 부분이다. 이에 대회를 준비할 때도 그들의 한국어 초안을 거의 건드리지 않는 방식으로 대본을 만들도록 돕는다.

△이 = 탈북민들은 모두 각자 자신만의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있다. 대회 참가자 중에는 북한에서 의사로 근무한 경험을 통해 북한의 부족한 의료상황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어머니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북한에서의 장애인 인권에 대해 알리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탈북과정에서 겪은 인신매매와 강제북송의 위협, 이산가족의 슬픔 등을 강조하고 싶은 사람도 있다. 각자가 세계에 알리고자 하는 ‘미션’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최대한 존중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돕고 있다.

―FSI의 목표는 무엇인지.

△이 = 탈북민들이 필요로 하는 금전적·사회적·심리적 지원은 많다. 하지만 그 부분은 다른 전문가들이 할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욕심 내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 내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탈북민들이 이곳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자아효능감을 느끼고, 삶의 크고 작은 고민이나 말하고 싶은 것이 생길 때 편하게 찾아와 친구처럼 털어놓을 수 있길 바란다. 탈북민에 대한 편견도 사라졌으면 좋겠다. 탈북민들은 외모와 말투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외국인에 비해서는 덜하지만, ‘탈북민’이라고 털어놓는 순간 주변 사람들은 그 사람의 모든 개별적 이야기와 개성을 없애고 탈북민이라는 정체성 아래 동정과 연민의 눈으로만 그 사람을 바라본다. 탈북민도 우리와 다를 바 없이 한국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존중받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젠가 ‘FSI 북한 지점’을 만들어, 북한에서 영어교육을 하는 순간을 꿈꾸고 있다. 꿈꿔온 통일도 이뤄질 것이라 믿는다.

11년전 탈북민 印연설 시작으로… ‘영어 말하기 대회’ 21차례 지원

■ 비영리단체 FSI는

영어 교육 프로그램·출판 등
탈북민 국제활동 다방면 후원

‘프리덤스피커즈인터내셔널(FSI)’은 북한에서 온 주민들이 자신이 경험한 북한의 현실과 인권상황을 전 세계에 영어로 알리는 활동을 돕는 비영리단체다. 2013년 ‘Teach North Korean Refugee Project(TNKR)’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2021년 현재의 FSI로 단체 이름을 변경했다.

영어교육 프로그램 제공과 영어 말하기 대회가 주된 활동이다. 강연, 출판(영문판) 등 탈북민들의 국제활동을 다방면으로 지원하고 있다.

영어 말하기 대회는 2014년 탈북민 주찬양 씨가 인도에서 열린 ‘아시아자유포럼’에서 연설을 한 것을 시작으로 2015년 본격적으로 개최됐다. 매해 2회 진행해 올해 2월 21번째 대회를 맞았다. 지난해 4월에는 미국 하버드대에서 탈북민 7명이 참석한 영어 말하기 대회가 열렸다. 이는 미국에서 최초로 열린 탈북민 영어 스피치였다. 참가자들은 자기 경험을 토대로 북한에서의 인권 침해, 장애인 인권, 여성 인권 등에 대해 연설했다.

탈북민으로서 겪는 정체성 혼란도 주된 주제였다. 오는 9월에도 하버드대에서 22회 영어 말하기 대회가 개최될 예정이다.

FSI를 이끄는 이은구 공동대표는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에서 북한학을 전공, 영국 셰필드대(University of Sheffield)에서 국제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북한인권정보센터, 한국교육개발원 탈북청소년교육지원센터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던 중 케이시 라티그 대표를 만나 FSI를 창설했다. 라티그 대표는 미국 하버드대 교육학 석사를 마친 교육 전문가로 2023년 12월 탈북민 정착지원 업무에 헌신한 공로로 통일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조율 기자 joyul@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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