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선거-실망의 지겨운 패턴 끊으려면 [.txt]

최윤아 기자 2025. 3. 21.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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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소설가, 농민… 각자 자리에서 쓴 오답 노트
‘시대 정신’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임별 디자인팀의 작품. 비상계엄 선포 이튿날인 지난해 12월5일 발표된 ‘전국 역사 교사 시국선언’ 속 문장에 그래픽을 입혔다. ‘시대 정신’ 제공

한국 현대사를 시각화한다면, 그 결과물에는 어떤 패턴이 반복될 것이다. 시민의 대규모 저항-대통령 선거-실망과 실패. 이 뻔하고 지겨운 패턴을 이번에는 좀 바꿔보자고, 무엇을 달리해야 역사에 새로운 무늬를 수놓을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하자고 제안하는 책들이 연이어 출간됐다. 역사학자, 에세이스트, 소설가, 농민, 그래픽 디자이너…. 업이 다른 이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당한들 민주주의의 위기가 절로 봉합되지는 않을 거라고. 찰나의 승리에 도취된다면 우리는 ‘그 세계’를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른다고. 그러니 우리는 더 처절하게 오답 노트를 써야 한다고.

민주공화국의 적은 누구인가 심용환 지음, 사계절, 1만5000원

‘민주공화국의 적은 누구인가’ 지은이 심용환은 현대사를 집요하게 헤집어 12·3 내란사태를 촉발하고, 지속하게 한 주체를 규명한다. 역사학자이자 저술가인 그는 윤석열 대통령의 ‘망상’이 개인적으로 형성되고 사회적으로 표출될 수 있었던 배경엔 이승만-박정희에 대한 ‘환상’에 가까운 역사 왜곡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짚으면서 “어제까지의 문제는 반드시 오늘의 문제”가 된다고 경고한다. 그러면서 군부, 공무원, 국회, 국민, 대통령 등 민주공화국을 구성하는 주체를 12개 갈래로 나눠 각 영역이 방치해 온 문제가 어떻게 오늘을 구성했고 내일을 장악할 수 있는지 짚어 나간다.

특히 ‘군부’의 환부로 ‘정훈교육’을 지목하는 부분이 눈에 띈다. “열성적인 종교 집단을 제외하고는 이보다 폐쇄적이며 집단적 교육을 집요하게 실시하는 조직이 어디에도 없다.” 군대가 남성들이 성인이 되어 처음 경험하는 정치적인 장소라는 점은 문제를 키운다. “한국의 교육제도는 지나칠 정도로 비정치적, 비사회적”이며 “유튜브를 제외하고 정치 감각을 기를 수 있는 곳은 군대밖에 없다”.

그런 군대에서 ‘신좌경사상에 대한 경계’를 주입하는 정신전력교육이 집중적으로 이뤄진다는 점은 비극의 씨앗이 된다. “모호하지만 무척 위험해 보이는 이 개념(신좌경사상)은 노태우 정권 시절 등장하여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새로운 좌익 사상을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사실 뻔하다. 민주화 이후 사회 변화, 그것이 지닌 진보적·발전적 모습에 대한 공포심 (…) 이들의 신좌경사상에 대한 공포는 2000년대 이후 두 가지 새로운 조류와 만나게 된다. 뉴라이트와 페미니즘이다.” 이번 사태에서 우리는 일부 70대 남성과 2030 남성이 세대를 넘어 ‘극우’라는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되는 현상을 지켜봤다. 지은이는 이 기현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피해 의식이 진보 정치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정서는 곧 극우적 태도로 돌변하였다. 이준석을 거쳐 김문수로 갔다고나 할까?”

12·3 내란사태를 포함해 역사상 모든 비상계엄은 육사 출신들의 사전 모의와 적극적 가담 없이는 이뤄질 수 없었다. 지은이는 이 점을 하나하나 짚으며 이렇게 썼다. “도대체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은 4년 동안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 군에 대한 민의 통제는 이제 교육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시대 정신’ 프로젝트에 참여한 유환준 디자이너 작품. 지난해 12월4일 발표된 ‘윤석열의 계엄령을 규탄하는 연세대학교 재학생 및 졸업생 모임’ 시국선언문 속 문장을 발췌해 작업했다. ‘시대 정신’ 제공.

‘다시 만날 세계에서’는 농민 김후주, 소설가 정보라, 에세이스트 임지은, 영화감독 오세연 등 지난 겨울 광장을 메웠던 여성 11인이 쓴 에세이 앤솔러지다. 이들은 광장에서 빛으로 서로를 환히 비추었던 시간들의 의미를 곱씹으면서 이 귀한 빛을 오래 꺼트리지 않기 위한 방법들을 고민한다.

농민 김후주는 ‘남태령 대첩’에서 목도한 ‘초공감’에 대해 썼다. 그는 자신의 엑스(X·옛 트위터)에 전봉준 투쟁단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올리면서 비농민의 광범위한 연대를 이끌어낸 주역이다. 김씨는 남태령에서 자신의 소수자성을 먼저 밝히고 발언을 이어가는 “새로운 전통”이 탄생했다는 점을 기록하면서 “하나의 목적, 목표에 대한 추동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역사와 이야기 속에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자는 염원이 담긴 간절한 소망을 나누는 자리가 남태령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모든 책임은 우리가 지겠다”는 한 농민의 비장한 발언에 ‘남태령 소녀’들이 즉각적으로 “같이 집시다!”라고 외친 일화를 전하면서 그는 “순간적인 동기화, 동질화가 일어났다”며 “이렇게 ‘체화’된 민주주의적 연대의 경험은 깊은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깨달음의 순간을 갖게 한다”고 했다.

다시 만날 세계에서 l 강유정, 김후주, 오세연, 유선혜, 이슬기, 이하나, 임지은, 전승민, 정보라 지음, 안온북스, 1만6800원

하지만 당연하게도 모든 광장이 다 남태령 같지는 않았다. 에세이 ‘아무튼, 데모’(위고·2024)를 쓴 소설가 정보라는 “시위꾼”답게 서울, 포항, 대구 등지의 집회에 참석한 후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광장에서 익명으로 안전할 수 있는 곳은 서울, 넓게 보아도 ‘남태령’으로 상징되는 수도권 지역밖에 없는 듯하다.” 지역 집회에도 여성 참여자 자체가 적진 않았지만, 발언을 하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비율은 현격히 적었다는 것이다. 합성 성착취물 제작, 지인 능욕 등 여성을 괴롭히는 것이 젊은 남성의 놀이 문화로 자리 잡은 이 나라 소도시에서 마음 편히 소수자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정 작가는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포용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에세이스트 임지은은 고속도로를 쌩쌩 달리는 택시 안에서 ‘반탄’과 불편한 대화를 나눈 일화를 전한다. 용산 부근에서 시위대를 지나치던 택시 기사는 묻는다. “그, 누구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질타를 목적한 질문을 작가도 더는 참지 않고, 두 사람의 위험한 동행이 시작된다.

시대 정신 권준호 , 김경철 , 김어진 , 문주화 , 박수지 , 봉성창 , 최명환 , 양다솔 , 안병학 지음, 안그라픽스, 2만원

‘시대 정신’은 시국선언을 시각언어로 표현한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12·3 비상계엄 직후 디자인 스튜디오 ‘일상의실천’은 동시대 디자이너에게 ‘지금, 디자인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물으며 1960년 4·19부터 2024년까지 발표된 시국선언문 250여개를 정리해 전달했다. 취지에 공감하는 63개팀이 이 시국선언 문장 중 하나를 골라 그래픽을 입혔다. 그렇게 빛 바랜 과거의 문장은 오늘의 선명한 외침으로 되살아났다. 권준호 일상의실천 대표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권력자가 민주주의를 위협할 때 시민이 저항하며 자발적으로 쓴 글이 시국선언문이기에 과거의 문장이 지금을 반영할 수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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