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교황, 바티칸의 금기를 깨다

신창용 2025. 3. 7. 07:0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베일에 가려졌던 교황의 병세, 투명하게 공개
2월21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상징탑에 투사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바티칸=연합뉴스) 신창용 특파원 = 교황과 관련한 속담 중에 '교황은 죽을 때까지 아프지 않다'는 말이 있다.

교황이 위독해져 선종하는 순간까지도 외부에서는 그 사실을 알기 어렵다는 의미다. 이는 교황청이 전통적으로 교황의 건강 문제를 철저히 비밀에 부쳐왔기 때문이다. 교황의 병세를 외부에 발설하는 것은 오랫동안 금기시돼왔다.

실제로 20세기의 마지막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0년대 초부터 파킨슨병의 전형적인 증상을 보였다. 손이 떨리고 얼굴 근육이 경직되고 말투가 어눌해지는 등 누구나 눈치챌 정도였지만 교황청이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2003년에 이르러서였다.

2005년 1월30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주일 삼종기도에서 목소리가 약했지만 그는 기운이 넘쳐 보였다.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호아킨 나바로 발스 교황청 대변인은 교황이 가벼운 독감에 걸렸다며 다음 날인 1월31일 일정을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교황청 내부 사정에 밝다는 이탈리아 언론들도 교황의 정확한 건강 상태를 알지 못했다. 이들은 교황청 관계자들을 인용해 교황이 이탈리아 전역에서 유행하는 독감에 걸린 것뿐이라고 보도했다.

이틀 뒤인 2월1일에도 교황청은 요한 바오로 2세의 병세가 심각하지 않다고 공식 발표했다. 하지만 그날 밤 11시께 교황은 독감과 후두경련에 따른 호흡 곤란으로 로마 제멜리 병원에 긴급 입원했다.

교황청 출입 기자 중 일부는 그제야 교황청이 교황의 건강 상태를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다고 항의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해 4월2일 선종했다.

이러한 전통은 요한 23세 교황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1963년 6월3일 위암으로 선종했지만 약 8개월 동안 위암 투병한 사실은 사후에야 공개됐다.

교황은 전 세계 14억 가톨릭 신자의 정신적 지주이자 '신의 지상 대리인'으로 불린다. 성스러운 존재인 교황의 건강 상태를 논하는 것은 불경으로 여겨진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입원한 로마 제멜리 병원 바깥의 요한 바오로 2세 동상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수 세기 동안 이어져 온 바티칸의 오랜 금기는 프란치스코 현 교황에 의해 깨졌다. 그는 지난달 14일 제멜리 병원에 입원한 이후 교황청을 통해 매일 아침과 저녁, 두 차례 자신의 건강 상태를 공개하도록 지시했다.

입원 초기에는 "교황청이 과연 교황의 병세를 투명하게 공개하겠느냐"는 의구심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우려는 사라졌다.

교황청은 교황이 양쪽 폐에 폐렴 진단을 받았다고 공개했고, 한때 위중한 상태에 놓였다고 발표했다. 더 나아가 지난달 28일에는 교황이 기관지 경련으로 구토와 함께 호흡곤란을 겪었고, 구토물을 흡입해 내시경 시술을 통해 이를 제거했다는 내용까지 상세하게 공개했다.

2021년 7월과 2023년 6월, 두 차례 교황의 수술을 집도했던 세르조 알피에리 제멜리 병원 외과과장은 지난달 21일 기자회견에서 "교황께서 모든 것을 숨기지 말고 공개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과거에는 교황 병문안을 다녀온 교황청 고위 성직자나 정치인 등을 통해서 건강 상태가 전언됐지만 이제는 교황청이 직접 구체적으로 정보를 공개하면서 '정보 격차'가 해소됐다.

이 과정에서 교황이 이미 사망했다거나 마지막 성사를 받았다는 등의 소셜미디어(SNS)에 떠도는 가짜 정보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결정은 그의 소탈하고 서민적인 성품을 드러낸 또 하나의 사례다. 그는 '서민 교황'이라고 불릴 만큼 권위를 내려놓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며 낮은 데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 힘써왔다. 만약 그가 자신을 절대적 존재로 여겼다면 구토물 흡입 사실까지 공개되는 걸 허용했을 리 없다.

역대 교황 중 가장 개혁적이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룬 작은 변화이지만 바티칸 역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개혁이라고도 볼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입원은 2013년 3월 즉위 이후 이번이 4번째. 현재 그는 즉위 이래 가장 긴 시간을 병상에서 보내고 있다. 건강 상태는 여전히 불안정하다. 며칠간 회복세를 보이다가 다시 호흡기 위기가 찾아오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교황의 미소와 유머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의 빠른 쾌유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교황의 건강 회복 기원 묵주기도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changyong@yna.co.kr

▶제보는 카톡 okjebo

Copyright © 연합뉴스. 무단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