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체면보단 국익 먼저’의 일본
“(트럼프의) 비위나 맞춘다고 다들 비난하지만 그를 칭찬해 일이 제대로 풀린다면 그보다 나은 건 없다”는 말이 고(故)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회고록에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싫어하는 언동을 하거나, 자신의 지론이라고 그와 부딪쳐봐야 일본 국익엔 득이 아닌 해라는 의미다. 트럼프 1기 때 미·일 밀월(蜜月)을 만든 아베가 트럼프와 골프 회동 때 벙커샷 치다 넘어진 일이 있다. 앞서간 트럼프를 얼른 따라가려 서둘러 채를 휘두르다 벌어진 일이다. 웃는 낯으로 금방 일어난 아베에게 일부에선 ‘굴욕 외교’라 비판했다. 아베는 개의치 않았다. 체면보단 국익이었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7일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 아베와 똑같이 행동했다. 이시바는 트럼프에게 “(암살 시도에 살아남은) 신에게 선택받은 인물” “잊힌 사람들(백인 노동자)에 대한 깊은 배려심” “매우 진솔한 지도자”라고 했다. 기자회견 때 미국의 관세 인상 시 보복할지 묻는 질문엔 “‘가정을 전제로 한 질문에는 답변할 수 없다’는 게 일본의 전형적인 국회 답변”이라는 농담을 던지곤 답을 회피했다. 트럼프가 싫어할, 단 한 컷도 연출하지 않았다.
‘아베의 방식’을 철처히 따른 이시바는 사실 아베의 정적(政敵)이다. 아베 총리 시절 줄곧 대놓고 그를 비판한 정치인이다. 일본인 지인은 “끔찍히 아베를 싫어하는 게 이시바”라고도 했다. 이시바의 지론은 미·일 동맹의 근간인 미·일 안보 조약이 불공평하니 대등하게 바꾸자는 것이다. 일본이 일방적으로 부담을 지는 구조를 탈피하자는 주장이다. 트럼프와 정상회담에서 그의 지론은 온데간데없었다. ‘정치적 수사보다는 정책 논의 우선’이란 그의 정치 신조도 사라졌다. ‘아부의 기술’이란 미국 뉴욕타임스의 직설적 기사는 이시바의 자존심에 생채기가 됐을 법하다. 회담 후, 이시바는 측근들에게 “할 수 있는 건 다했다”고 말했다.
최근 도쿄에서 김형오 전 국회의장을 만났다. 오는 13일 가칭 ‘국민의힘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세미나에서 연설한다는 그에게 국민의 한 사람으로 부탁했다. “국내 정치 말고, 제발 엄혹한 국제 정세에도 눈을 돌려달라.”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중국의 대만 침공 위협, 불가측의 트럼프 대통령 취임과 같이 외환(外患) 우려가 최고조인 상황에서 내란, 탄핵소추, 차기 대선 운운과 같은 국내 정치에만 몰두하는 대한민국. ‘자기 신념의 사나이’라는 이시바 총리가 왜 정적인 아베를 따라 했겠나. 회담 전 일주일 동안, 트럼프의 모든 예상 발언에 대한 대응 답안을 만들고 모두 암기했다는 이시바 총리다. 정쟁이 극심할 때마다 외세에 시달렸다는 게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이다. 정치인들이 한반도 운명의 운전석에 앉아 있다는 역사의 책임감을 제발 명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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