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면 달라지는 은퇴 남성의 삶, 제가 경험했습니다

이혁진 2025. 1. 29.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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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살남] 은퇴자의 행복한 노후는 먼 곳 아닌 집에서 시작된다

급격한 고령화와 충분치 않은 노후대비는 노후생활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55년생, 은퇴 후 전업 살림을 하는 남편으로서의 제 삶이 다른 퇴직자와 은퇴자들에게 타산지석과 반면교사가 되었으면 합니다. <기자말>

[이혁진 기자]

독일의 첫 여성 총리 메르켈이 슈퍼에서 장 보는 장면이 찍힌 사진은 유명하다. 그가 독일 국민에게 친근하고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이다.

퇴임 후 메르켈의 일상도 다른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메르켈의 일상을 새삼 거론하는 이유는, 가정에서의 역할은 쉽게 포기하거나 남이 대신할 수 없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이다.

요즘 젊은 부부들은 대부분 직장을 나가고 '워라밸(일-생활 균형)'을 강조하면서 우리 세대와는 사뭇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이들은 바쁜 가운데 가사를 분담하고 있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즉 가사 분담을 젊어서부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1955년생 나를 비롯한 우리 1차 베이비부머(1955~1963)들은 과거 가정 내 역할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남자는 나가서 돈을 벌고 여자는 집에서 아이를 양육하는 정도를 배웠을 뿐 가사 분담은 남성에겐 미지의 영역이었다.

'남자는 부엌 멀리' 듣고 자란 베이비부머, 하지만

하여 예외는 있겠지만, 대부분이 완고하고 고루한 편이다. 대부분 어렸을 때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자랐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세태는 직장을 다니면서도 크게 바뀌지 않아 은퇴 후 가정에서의 입지는 좁아졌다. 나 또한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
 1955년생 나를 비롯한 우리 1차 베이비부머(1955~1963)들은 과거 가정 내 역할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자료사진.)
ⓒ kalljet on Unsplash
지난해 은퇴를 시작한 2차 베이비부머(1964~1974, 950만 명)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1차 베이비부머보다 교육과 경제 수준이 조금 낫다고 하지만 이들도 가정에서 제 역할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실정이다.

은퇴자가 직면한 과제와 도전은 단순하지 않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령화 대책과 사회구조 개선이 다급하지만 여기서는 가족 구성원인 은퇴자의 가사 분담과 화합을 모색해 보는 것이다.

은퇴 후 재취업과 창업 등 새로운 인생을 도전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원치 않는 휴식(?)에 따른 심리적 공황과 상실감을 경험하게 된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사실 힘든 것은 아내도 마찬가지다. 남편의 은퇴를 위로하면서도 이전과는 달라진 환경이 낯설고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고령사회'가 변화의 시간이듯이, 은퇴를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져야 한다. 은퇴자들은 무엇보다 집에서 새로운 인생 2모작을 시작해야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가사에 대한 이해와 실천이다.

먼저 은퇴를 경험한 입장에서 새로운 삶을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집에서 찾을 것을 권하고 싶다. 그간 가사는 아내 전유물로 여겼지만 이제 그 전유물의 일부를 은퇴한 남편이 가져오는 것이다. 첫 번째가 가사도우미 역할이다. 그중에서도 청소하는 일이다.

청소가 집안살림의 기본이라는 걸 배우게 되면, 그간 아내의 수고로움에 공감하고 새삼 감사할 것이다. 나아가 청소하는 보람도 느낀다면 행복한 노후를 보장할 수 있다.

그런데 집안청소가 만만치 않다. 생각보다 범위가 넓다. 쓰레기 청소뿐 아니라 화장실 청소, 설거지까지 포함하면 생각보다 광범위하다. 이것들을 한꺼번에 하겠다고 욕심내면 작심삼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가정이 은퇴 뒤에 내 앞에 펼쳐진 초원이라는 교훈
 설거지를 하는 뒷모습을 아내가 찍어줬다.
ⓒ 이혁진
나 또한 50대 이른 은퇴 후 근 20년 집안 청소를 도맡아 왔다. 아내들이 청소를 잘한다? 꼭 그렇지도 않다. 아내들 입장에서도 꺼리고 힘든 일, 힘든 노동이 집안 청소와 가사 일이다. 남편들이 대신 해주길 기대하는 부분이다. 이는 즉 남자들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쓰레기 청소의 완성은 분리수거와 배출이다. 아파트 쓰레기 수거장으로 가져가야 한다. 음식물쓰레기도 스스로 처리해서 버릴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 동네는 문 앞과 도로에 별도 쓰레기 배출장소가 있는데 나 또한 여기서 많은 사람을 만난다.

가끔 아내가 내가 하던 청소일을 챙겨주면 그렇게 고마울 수 없다. 며칠 전엔 아내가 나 몰래 주방 싱크대 배수구를 깔끔히 청소했다. 설거지 담당인 내가 하는 일을 격려차 기꺼이 도와준 것이다.

이제는 가사에서도 '은살남(은퇴 후 살림하는 남자)'인 내가 차지하는 영역과 역할이 상당하다. 그러나 잘한다고 해도 가사 주도권은 아내가 쥐고 있어 늘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 여전히 살림을 보좌하는 수준이다.
 아내를 도와 알타리김치를 버무리는 사진
ⓒ 이혁진
'너무 멀리 보는 사람은 자신 앞에 펼쳐진 초원을 보지 못한다'는 인도 격언처럼, 이제는 집과 가정이 은퇴 뒤에 내 앞에 펼쳐진 초원이라고 생각한다.

아내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는 은퇴 남성들을 가끔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자존심은 아내가 세워주는 법이다. 은퇴자들은 누구보다 아내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면 밖에서도 대접받을 수 있다.

'은살남'이 강조하는 것은 간단하다. 은퇴자는 밖에서 보다 집에서 먼저 새로운 역할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명재처(人命在妻), 즉 '인명재천'을 활용해 '사람의 운명이 아내들에게 있다'라는 말은, 웃자고 만든 단어이긴 하겠으나 한편 은퇴자들이 명심할 경구다. 은퇴의 시간은 아내와 가족을 위해 헌신할 '골든타임'이다.

회고하면 과거 집 밖의 궂은일은 남자들이 했다. 그러나 정작 힘들고 귀찮은 집 안팎의 일, 가사노동은 지금껏 대부분 여자들이 짊어져 왔다. 이제 시대가 바뀌고 있지 않나. 은퇴 남성들도 가사 노동을 분담하고 함께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은퇴 이후의 삶은 사실 각자 선택에 달려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행복한 노후는, 아내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하는 인생이다. 은퇴한 남편들의 새로운 인식과 분발이 필요하다. 당장 가사노동 중 특히 아내가 꺼려하는 일, 힘들어 하는 일을 찾아 바로 그 가사를 돕는 역할부터 수행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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