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이 건물에 '대통령 이름' 새겨질 뻔했다

김종성 2025. 1. 29.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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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시대별곡] 이승만의 욕망이 반영된 세종문화회관의 역사

[김종성 기자]

 세종문화회관 전경
ⓒ 연합뉴스
서울 광화문광장 서편의 세종문화회관은 원래 '이승만문화회관'으로 계획한 곳이다. 이승만의 호인 우남(雩南)을 따서 우남회관 혹은 우남기념회관으로 명명하고 문화·예술 공간으로 쓰고자 했다. 세종문화회관이 그런 이름을 가질 뻔했다는 점은 지금의 극우세력이 광화문광장을 이승만광장으로 부르고 근처에 이승만기념관을 세우려 하는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우남회관 건립이 추진된 것은 1875년 3월 26일생인 이승만이 80회 생일을 맞은 1955년이다. 그의 팔순을 앞두고 그해 3월 20일 발행된 <경향신문> 3면 상단은 "서울시에서는 거족적으로 경축하게 된 이 대통령 80회 탄신일 26일을 맞이하여"라는 첫 문구로 시작한 뒤 "가가호호에서는 국기 게양을 잊지 말기를 요망"한다고 전한다. 그런 다음, "서울특별시에서는 18일 이 대통령의 80회 탄신일을 기념하기 위해 우남기념회관을 설립할 계획을 수립하였다"라고 보도한다.

건축을 실무적으로 지휘한 인물은 서울시 건설국 영선과의 윤진우 공사계장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만든 인터뷰 영상인 '제2공화국과 한국의 민주주의(윤진우)' 편에서 그는 "그때만 하더라도 우남회관은 뾰족한 타워 같은 건물"이었다고 한 뒤 "어떤 의미에서는 아부 근성에 의해서 그것을 지었죠"라고 말했다.

당시의 서울시장인 김태선(1903~1977)은 해방 직후에 미군정 경찰 간부가 되고 정부수립 뒤에 수도경찰청장·서울시경찰국장이 됐다. 그는 친일청산기구인 국회 반민특위 위원들에 대한 뒷조사를 벌여 특위 활동을 훼방한 일로 유명하다.

김태선은 이승만 정권이 항일운동가나 진보진영 인사를 억지로 전향시켜 가입하게 만든 국민보도연맹에도 관여했다. 이 단체에 편입된 사람들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 대량학살을 당했다. 김태선은 서울시경찰국장 자격으로 보도연맹 운영협의회에 참여했다. 바로 이 인물의 아부 근성이 우남회관 건립에 큰 영향을 줬다는 것이 윤진우 당시 계장의 진술이다. 이승만 정권을 위해 손에 피를 많이 묻힌 김태선이 우남회관 건립의 핵심 인물이었던 것이다.

막대한 건설비, 결국 '우남'이라는 글자는 빠졌다

우남회관 부지는 조선시대 때는 형조 관아였고 일제 때는 체신부 청사였다. 우남회관 건립 계획이 발표될 당시에는 임시 학교 건물이었다. 1955년 11월 23일자 <동아일보> 3면 좌하단은 이곳이 "경기중고교 가교사(假校舍)"였다고 알려준다. 서울시는 이곳에 우남회관을 지으면서 "학생들의 예술전당으로 활용될 것"이라고 말했다(같은 날 <경향신문> 3면). 이승만을 미화하기 위한 실제 목적은 감췄던 것이다.

이듬해 6월 3일 자 <경향신문> 3면 중하단은 공사비 예상액이 7억 환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수복 이후 최초로 보는 대규모의 공사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한국전쟁 중의 9·28 서울 수복 이후로 최대 공사가 되리라는 예측이었다. 한편, 최초의 공사비 예정액이 6억 환이었다는 보도도 있다.

위 기사가 보도되기 직전에 나온 그해 5월 30일자 <조선일보> 1면 사설은 5월 말에 쌀 1가마니가 18000환 정도였다고 말한다. 지금은 쌀 1가마니가 20만 원을 넘으니, 공사비 7억 환을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려면 10 이상을 곱해야 한다.

그런데 애초 계획한 공사비는 계속 부풀어갔다. 1961년 9월 22일자 <조선일보> 2면 좌단은 "당초 6억 예산이던 것이 중간에 10억, 12억, 16억, 18억에서 요즈음에 20억 가까운 돈이라야 완성케 되었"다고 보도했다.

이 공사는 원래 1956년 연말쯤 끝날 것으로 예상됐었다. 그랬던 것이 1960년을 넘기면서 공사비도 근 20억으로 불어났다. 공사비와 공사 기간이 늘어난 것은 윤진우의 말처럼 아부 근성과 관련이 있다. 위 기사는 "아첨배들의 농간으로 더욱 좋게 만든다는 것이 시 재정 빈곤 때문에 시일을 끌게" 됐다고 전한다. 더 좋게 만들려고 재원을 계속 조달하다 보니 시간이 지연됐던 것이다.

1950년대 중후반은 한국전쟁의 상처로 국민들이 고난을 겪을 때였다. 그런 시절에 학교 건물을 없애고 대통령을 우상화하는 공간을 세우고자 했으니 세상의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 어느 신문사 기자가 1956년 6월 22일 대통령에 대한 질문지에서 이 문제를 거론했다.

이틀 뒤 <경향신문> 1면 '기자석'에 따르면, 질문의 요지는 "민생문제가 도탄에 빠진 오늘날 우남회관 건립에 막대한 비용을 사용하는 데 대한 이 대통령의 의(意)O(글자 소실... 편집자 주)을 들어보자"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의중을 묻는 이 질문은 대통령 직속 공보실에 의해 차단됐다. "개인 문제에 관한 것으로 질문학적으로 보아 좋지 않다"는 것이 공보실이 밝힌 차단 사유다.

이승만도 국민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그렇지만 공사를 중단시킬 생각은 없었다. 1957년 1월 6일 그는 이 문제에 관한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다음날 <동아일보> 3면 하단에 따르면, 담화에서 이승만은 회관 명칭이 우남인 줄 몰랐다는 해명을 내놓았다.

"그 명칭을 내가 알면 허락치 않을 염려가 있다는 생각으로 일이 거의 다 진척될 동안 대통령에게 알리지 말아야겠다는 의도로 시작한 줄로 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그는 우남이란 글자를 빼도록 지시했다면서 "그러나 회관은 지어 놓아야 될 것이다"라고 주문했다. 회관 명칭에서 우남을 빼라고 지시했다는 이승만은 이듬해 11월 16일 우남회관 낙성식으로 명명된 행사에 프란체스카 부인을 대동하고 참석했다(<경향신문>1958.11.18-3면).

이승만은 자기 호는 빼더라도 회관만큼은 지어놓으라고 담화에서 주문했다. 말이 씨가 된다고, 이 말은 그대로 성취됐다. 더 잘 지어보자며 완공을 늦추던 중에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고 이승만은 하와이로 도주했다. 이로 인해 우남이라는 글자를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 뒤에 이 건축물은 완공됐다.

'왕'이 되지 못한 이승만
 지난 2024년 2월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열린송현녹지광장에서 열린 이승만기념관 건립추진 규탄 기자회견에서 청년대학생겨레하나 관계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2024년 2월 23일 서울시의회 임시회 시정질문에서 이승만기념관 건립 장소로 송현광장을 언급했다.
ⓒ 연합뉴스
1961년 11월 8일 자 <동아일보> 2면은 "시민회관 개관식이 7일 하오 4시 5분 국가재건최고회의 박 의장, 이 부의장, 한 내무부장관, 윤 서울시장 등을 비롯하여 시민 다수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다"고 보도했다. 우남회관이라는 이름으로 착공됐다가 시민회관이란 이름으로 개관된 이 공간은 1972년 겨울에 화재로 소실된 뒤 1978년에 세종문화회관이란 이름으로 거듭났다.

우남회관 부지가 광화문 앞쪽으로 결정되던 시기에, 이승만과 관련된 행사가 광화문에서 서울시청을 거쳐 남대문에 이르는 직선거리에서 자주 열렸다. 1956년 5·15 대선을 앞둔 그해 3월 8일에는 '이 박사 출마 요청 궐기대회'가 시청 광장에서 열리고, 9일에는 '이 박사 출마 요청 민중대회'가 광화문 안쪽의 중앙청 광장에서 열렸다. 동년 8월 15일에는 정·부통령 취임식이 같은 장소에서 열렸다. 이런 행사들이 열리던 공간에서 우남회관이라는 문화공간을 짓게 됐던 것이다.

전주 이씨인 이승만은 왕족 의식이 강했다. 3선 개헌에 성공한 1954년부터는 사실상 군주의 길을 걸었다. 그런 그를 옹립한 이승만 정권이 위 직선거리의 출발점에 이승만 명의의 문화회관을 건축하고자 했다. 광화문 앞에 문화회관을 세우고자 한 이 일은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구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왕조시대에 한자 화(化)는 군주의 교화를 뜻하는 용도로 활용됐다. 군주의 이념과 가치관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화'였다. 창경궁 홍화문, 창덕궁 돈화문 등에서 나타나듯이 궁궐 대문에 '화'가 많이 쓰인 것은 군주의 지배 영역을 확장하고자 하는 욕망을 반영했다. 그런 시절에 군주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곳은 화외(化外)로 간주돼 야만시 됐다. <중종실록> 같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여진족 등이 그렇게 지칭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50년대는 일본 왕조의 지배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다. 그래서 왕조시대의 '화' 관념이 지금보다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 시기에 이승만 집권 기간 내에 광화문 앞에 우남회관이 세워졌다면, 경복궁 뒤편 경무대에서 이승만이 내보내는 이념이 광화문과 우남회관을 거쳐 세상에 퍼져나가는 화(化)의 구도가 관념상으로 형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남문화회관'은 세상에 태어나지 못하고 시민회관이란 이름으로 출생했다가 지금은 세종문화회관이란 이름으로 살고 있다. 이 과정은 우남회관을 무대로 이승만을 신성시하고 그의 이념을 퍼트리고자 했던 이승만 정권의 의도가 미수로 끝난 현실을 잘 반영한다. 지금의 극우세력이 광화문광장을 이승만의 이념적 기지로 만들려 애쓰는 것은 불발로 그친 그런 의도에 대해 그들이 아직도 애착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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