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칼럼] 언어의 하이퍼인플레이션
계획적이라기보다는 우발적인 실수로 보인다. 단초는 ‘법원판결에 승복해야 한다’는 한동훈 대표의 발언이었다. 심기가 불편해진 이재명 대표가 이 발언을 받아치려다가 선을 넘어 버린 것이다. “최근 계엄 얘기가 자꾸 이야기된다.”
사실 계엄령 시나리오는 민주당 강성 지지층 일각의 하위문화 현상이었다. 그런데 공당에서 이 음모론을 덜컥 받아들인 것이다. 이재명 대표가 자꾸 들었다는 그 “계엄 얘기”는 사실 그 당 지도급 인사들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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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지층 일각 떠돌던 계엄 음모론
민주당 지도부 공식 입장 돼버려
탄핵을 전제로 하는 집단 상상력
당대표 판결 앞둔 히스테리 불과
」
“차지철 스타일의 김용현 경호처장을 국방부 장관으로 지명하고 ‘반국가세력’이란 발언도 했다. 이런 흐름은 국지전과 북풍 조성을 염두에 둔 계엄령 준 작전이라는 게 나의 근거 있는 확신이다.” 김민석 의원의 말이다. 그는 민주당의 수석최고위원이다.
“국방장관 후보자, 행안부 장관, 방첩사령관 등 이른바 계엄령 키맨들이 모두 윤 대통령의 고교 동문이다. 대통령 탄핵 상황이 오면 계엄령 선포가 우려된다.” 그 당에서 최고위원을 하고 있는 김병주 의원의 말이다.
당의 전략기획위원장도 말을 보탠다. “박근혜 정부 시절 실제로 계엄에 대한 검토가 있었고 준비됐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지지 않았나. 지금 이 정권에서도 어딘가에선 그런 고민과 계획, 기획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보고 있다.”
당을 대변하는 수석 대변인까지 “여러 가지 의심과 정황이 있다”고 거들고 나섬으로써 이 계엄령 시나리오는 지지층 일각에서 떠드는 음모론의 수준을 넘어 아예 대표를 위시한 민주당 지도부의 공식 입장이 되어 버렸다. 한 마디로, 자기들이 보기에도 남세스러워서 안에서 자기들끼리만 주고받던 얘기를, 대표회담에서 평정심을 잃고 실언을 한 대표님을 엄호하려다가 얼떨결에 밖으로 끄집어내 주책없이 공식화해 버린 꼴이라고 할까.
‘근거’와 ‘제보’가 있다고 했지만 민주당에선 그것들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김용현 체제에 불만을 품은 국방부 인사들이 제보를 해왔지만 정확한 근거는 확보하지 못했다”고 실토했다. 도대체 무슨 제보를 해왔다는 것일까? 이 대표의 심복이라는 정성호 의원이 그 제보의 실체를 밝혔다. “제보도 받고 있다고 하는데 대개 그런 상상력 아니겠나.” 그 무시무시한 시나리오의 근거가 고작 ‘상상력’이란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간단하다. 극단적 언어를 남발하다 보면 대중은 자극에 둔해지기 마련. 무뎌진 대중의 감성에 충격을 주려면 언어는 더 자극적이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언어가 인플레이션에 빠지게 된다. 신문에 도배되는 ‘탄핵’ ‘특검’ ‘국조’ ‘청문회’ 같은 말들. 하도 남발되어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무게를 지니지 못한다. 새로 등장한 ‘계엄령’은 평범한 인플레이션을 넘어 하이퍼인플레이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1경 짐바브웨 달러를 US 달러로 바꿔야 1달러도 안 된다고 한다. ‘계엄령’도 마찬가지다. 그 말의 액면가는 어마무시하다. 총을 든 군인들이 막 야당 국회의원들을 체포·구금한다지 않는가. 그런데 실체 가치는? 달랑 1원짜리 ‘상상력’.
이 싸구려 ‘상상력’은 민주당을 사로잡은 어떤 ‘불안감’에서 비롯된다. ‘계엄’이라는 상상의 논리적 전제는 ‘탄핵’의 상상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현 정권이 계엄을 계획하는 것은 다가올 대통령 탄핵을 저지하기 위해서라지 않는가. 사실 ‘탄핵’ 역시 허무맹랑하기는 ‘계엄’ 못지않다. 그런데도 민주당의 정치인과 지지자들은 우리와 달리 그 허구를 꽤 현실적인 가능성, 아니 곧 다가올 현실로 믿는 듯하다. 그래서 지레 ‘계엄’ 걱정까지 하는 것이다.
사실 ‘탄핵’이나 ‘계엄’ 같은 파국의 언어는 민주당 정치인과 지지층의 종말론적 멘탈리티를 보여준다. 원래 제힘으로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적 상황에 처한 인간들에게 허용된 마지막 희망이 바로 종말론 신앙이 아닌가.
불안의 근원은 역시 대표의 사법 리스크. 이를 피하려면 대법원 확정판결 전에 대선이 치러져야 한다. 그런데 판결이 언제 내려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불확실성을 제거하려면 인위적 파국이, 즉 대통령 탄핵이 필요하다. 이 주관적 소망을 그들은 이미 반쯤은 객관적 ‘현실’로 인지한다. 그래서 ‘계엄령’ 운운하며 아직 오지 않은 그 ‘현실’을 앞당겨 놓고, 목하 종말의 날에 벌어질 아마겟돈의 결전을 대비해 지지자들의 전의를 다지고 있는 것이리라.
‘탄핵’과 ‘계엄’이라는 언어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은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극도의 불안에 빠진 민주당과 그 지지층이 부리는 집단 히스테리라 할 수 있다. 이 격한 반응을 촉발한 ‘투셰(touche)’, 혹은 이 바닥 전문용어로 ‘발작 버튼’은 한동훈 대표의 모두 발언. “(검사 탄핵은) 이 대표 판결 결과에 불복하기 위한 빌드업….”
진중권 광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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