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 먹은 ‘국민 채소’ 대파…밭도 농민 가슴도 바짝 말랐다
“요 대파 살 빠진 거 좀 보이소. 폭염이 너무 길어지니까, 살아남으려고 지 스스로 몸집을 줄인 겁니더.” 지난달 26일 오후 2시쯤 부산 강서구 강동동 대파밭. 32도의 무더위 속에 구슬땀을 쏟으며 대파를 돌보던 엄중식(52)씨가 탄식처럼 내뱉은 말이다. 대파는 뿌리에서부터 계속해서 새잎을 피워 올린다. ‘살이 빠졌다’는 건 더위가 심해지자 잎 크기가 작아지고 새잎도 더디게 올리는 걸 두고 한 말이다. 엄씨는 “날이 뜨거울 때 물을 잘못 주면 달궈진 물에 대파가 익을 수도 있다. 지금은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엄씨가 일구는 밭(2314㎡·700평) 에 심은 대파는 잎끝마다 타들어 간 듯 갈색으로 시들어 있었다. 동행한 부산농업기술센터 최운기 주무관은 “잎마름병에 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파는 기온이 15~25도일 때 가장 잘 자라는데, 올해 여름은 33도를 넘는 고온이 장기간 이어지자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다. 잎마름병은 대파 생산량을 떨어트린다. 최 주무관은 “대파 안팎을 갉아먹는 파좀나방과 파밤나방, 뿌리가 물러지는 무름병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엄씨 밭 대파는 관리가 잘 돼 상태가 좋은 편이다”고 덧붙였다. 일대 13㏊ 면적에 대파밭을 일구는 농가 30여곳 가중 10여곳이 더 심한 무름병과 나방 등 병충해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대파는 많은 국민이 즐겨 찾는 필수 식자재인 데다 가격 변동성이 커 정부가 작황 등을 민감하게 주시하는 작물이다. 단적으로 지난 4월 총선을 앞두고 윤석열 대통령의 “대파 한단 875원” 발언이 큰 화제가 됐다. 부산에선 본래 1970년대 전후로 재배가 시작된 강서구 명지동 일대 명지대파가 유명했다. 뿌리가 단단하고 특유의 매운맛이 강해 정부 식품 인증을 받았고,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한때 전국 대파 생산량의 70%가 명지동 일대에서 나올 만큼 작황이 좋았다. 하지만 신도시 조성으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며 명지대파의 전성기가 저물었다. 대신 인접한 강동동에서 다른 작물과 함께 대파밭을 일구는 농가가 명맥을 이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손쓸 수 없는 정도의 무더위나 예상을 벗어나는 폭우가 이어지면서 대파밭 돌보기를 아예 포기한 농가도 있다. 엄씨 밭에서 차로 약 5분가량 떨어진 거리의 대파밭은 이미 관리를 포기한 듯 잎 전체가 바싹 말라 있었다. 한때 대파를 재배했지만, 지금은 경작을 포기해 무성한 잡초 사이로 드문드문 대파가 보이는 비닐하우스도 눈에 띄었다.
대파는 3.3㎡(1평) 단위로 평당 6000 ~1만5000원 선에서 거래가 이뤄진다고 한다. 일대 대파밭 위치를 알고 있는 수매업자가 파종 시기에 맞춰 농가를 돌며 미리 매입 약속을 잡아둔다. 이때 계약금도 건다. 그런데 올해는 폭염에 작황이 나쁘자 계약금을 떼이면서도 매입을 포기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고 한다. 대파를 수확하고 손질해 팔아넘길 경우 더 큰 손해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최 주무관은 “무름병 등 피해 현황을 파악하고 병해 방제를 안내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대책은 되지 못한다. 폭염이 계속 이어지고 작황이 나쁘면 또다시 대파 가격이 널뛸 수 있을 것으로 우려된다”고 말했다.
김민주 기자 kim.minju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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