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 전라여성이 후보? 난장판 된 도쿄도지사 선거 [방구석 도쿄통신]

김동현 기자 2024. 6. 26.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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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후보 게시판 절반인 24명 막무가내 출마시켜
그 포스터 공간을 돈받고 판 졸속당
제지할 규정 없어, ‘선거 윤리 어긋난다’ 비판
한국은 일본을 너무 모르고, 일본은 한국을 너무 잘 안다.
일본 내면 풍경, 살림, 2014

국내 언론 매체들은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의 이야기를 주로 정치나 경제, 굵직한 사회 이슈에 한해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고, 일본에서 교환 유학을 하고, 일본 음식을 좋아하고,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기자가 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지금 일본에서 진짜 ‘핫’한 이야기를 전달해드립니다.

방구석 도쿄통신’, 지금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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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미나토구에 설치돼 있는 2024 도쿄도지사 선거 후보 포스터. 48칸 중 절반(24칸)이 같은 사람으로 도배돼 있다. 도배된 인물은 정치 단체 'NHK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당' 다치바나 다카시 대표/도쿄=김동현 기자

지난 주말 도쿄에 다녀왔습니다.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방구석 도쿄통신은 서울에서 연재합니다. 작년 8월 연재를 시작하고 도쿄를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이번 도쿄 일정 숙소는 미나토구 미타(三田)역 근처였는데요. 각국 대사관과 대기업 본사들이 즐비한 곳입니다. 그런데 볼일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가던 중 이상한 풍경을 목격했습니다.

일본 도쿄 미나토구에 설치돼 있는 2024 도쿄도지사 선거 후보 포스터. 48칸 중 절반(24칸)이 한 사람 얼굴로 도배돼 있다./도쿄=김동현 기자

지난주 토요일 숙소 근처의 한 인도(人道)를 걸어가는데, 시민 5~6명이 발걸음을 멈추고 웅성대고 있었습니다. 성인 두 명이 간신히 지나갈 좁은 길이었는데요. 이곳엔 내달 7일 치러지는 2024 도쿄도지사 선거 후보들의 포스터 게시판이 설치돼 있었는데, 포스터 48칸 중 절반(24칸)이 같은 사람 얼굴로 도배돼 있었습니다. 한 50대 직장인은 “복제 인간도 아니고 기이하다”며 “거리 미관에도 나쁘고 다른 후보 정책에 눈이 가지도 않는다. 도대체 왜 이런 거냐”고 하더군요.

현재 도쿄에 설치된 도지사 선거 포스터 게시판은 약 1만4000곳. 이중 상당수가 제가 있던 미나토구처럼 한 사람의 포스터로 도배돼 있다고 합니다. 도쿄 선거관리위원회엔 게시판이 설치된 지난 20일부터 다음 날까지 1000건 이상의 관련 민원이 제기됐다고 하고요.

일본 정치 단체 'NHK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당' 다치바나 다카시가 자신의 반려견을 들고, 반려견 사진으로 도배된 도쿄도지사 선거 입후보자 게시판을 소개하고 있다./유튜브
최근 일본 도쿄도지사 선거 입후보자 게시판에 알몸 상태의 사진을 게시해 논란이 된 인플루언서 사쿠라이 미우(오른쪽)/X(옛 트위터)

일부 지역 게시판엔 알몸에 가까운 여성이 풍속점을 홍보하거나, 뜬금없이 반려견 한 마리가 인쇄된 선거와는 거리가 먼 포스터들이 도배됐습니다. 도쿄 한인타운인 신오쿠보 인근 게시판은 “다케시마(독도의 일본 명칭)는 일본 땅”이라고 적힌 포스터로 가득합니다.

도쿄의 한 도지사 선거 입후보자 게시판에 '다케시마(독도의 일본 명칭)는 일본 땅'이라고 적힌 포스터가 도배돼 있다./도요게이자이 온라인

일본 정치·경제 기능이 집중된 최대 도시이자 수도(首都)의 수장을 뽑는 선거가 약 2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가운데 도쿄 곳곳에 설치된 입후보자 게시판이 선관위 규정의 맹점을 악용한 포스터 도배로 질서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NHK 직원 출신으로 2013년 ‘NHK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당’이란 정당을 출범시킨 다치바나 다카시(57)/슈칸분슌 온라인

‘범인’은 정치 단체 ‘NHK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당(이하 NHK당)’입니다. 공영방송 NHK의 수신료 징수 문제와 내부 비리를 폭로하는 단체로 2013년 출범했는데요. 한때 비례의석을 얻고 국회에도 입성했지만 현재는 지도부 내홍 문제로 정당으로서의 역할이 사실상 마비된 상태입니다.

NHK당의 내홍과 관련한 문제는 과거 방구석 도쿄통신과 지면 칼럼으로 소개해드린 적 있습니다.

일본 졸속黨의 최후… 창당 5년 만에 파산했다 [방구석 도쿄통신] ☞ 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4/03/20/HQAB5ETDANA5NDBHCW5LNHR4IA/

[기자의 시각] 졸속黨의 최후 ☞ chosun.com/opinion/journalist_view/2024/03/28/NPTCOPXUUZCZFIDYTVWG5U6ZVQ/

다치바나 다카시/유튜브

NHK당 설립자인 다치바나 다카시(57)는 최근 기자회견을 열고 “우리 당 소속 정치인 24명이 도지사 선거에 입후보한다”고 밝혔습니다. 24명은 직전 선거였던 2020년 전체 입후보자 수(22명)보다 많습니다. 게다가 이들 중 대부분은 정치 경력이 전무했죠. 일본에선 30세 이상 자국민이면 누구나 300만엔(약 2600만원)의 공탁금을 내고 선거에 출마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목적이 선거 출마가 아닌 다른 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본 선거 규정에 따르면, 후보들은 타 후보에 대한 맹목적 비난이나 허위 내용이 아니면 포스터를 맘대로 꾸밀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할당된 포스터에 다른 사람 사진을 넣거나, 아예 사람이 아닌 동물이나 글로 채우는 것도 가능합니다.

한 사람의 얼굴로 도배된 일본 도쿄도지사 선거 입후보자 게시판/교도통신

NHK당은 이를 악용해 입후보자 게시판 절반을 차지하는 24명을 출마시키고, 이들에게 할당된 포스터 공간을 일반 시민에게 돈을 받고 판매했습니다. ‘선거 윤리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빗발쳤지만 이를 제지할 규정은 없습니다. 이에 유튜버 등 인플루언서와 풍속점, 정치 단체들이 돈을 내 NHK당 게시판에서 자신들의 홍보 활동을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산케이신문에 따르면, 이렇게 거래된 게시판은 현재 최소 1000곳이라고 합니다.

NHK당이 포스터 이용 대가로 받는 돈은 게시판 한 곳당 2만5000엔(약 22만원). 당초 5000엔을 부르더니 점점 올렸고 지금은 5배로까지 뛰었습니다. 1만4000곳의 게시판이 모두 거래되면 NHK당이 거둬들일 수입은 3억5000만엔(약 30억5000만원)에 달합니다. 입후보자 24명 공탁금인 7200만엔을 크게 웃도는 금액이죠.

한 사람의 얼굴로 도배된 일본 도쿄도지사 선거 입후보자 게시판/산케이신문 온라인

이들의 매매 행위를 두고 “공직선거법상 처벌 대상일 수 있다”(마쓰모토 다케아키 총무상)는 당국 경고도 나왔지만, NHK당 측은 포스터 이용 대가가 매매가 아닌 ‘정치 기부금’ 명목이라고 포장하고 있습니다.

NHK당의 이러한 횡포로 이번 도지사 선거엔 무려 56명의 후보가 출마했습니다. 도쿄도의 포스터 게시판은 최대 48칸이어서, 입후보 순서가 늦은 후보들은 별도의 아크릴판을 게시판에 붙여 사용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원칙적으로 모든 입후보자가 출연하는 NHK 토론 방송은 11시간 넘게 길어질 수 있다고 닛테레뉴스는 보도했습니다.

다음 달 7일 치러지는 일본 도쿄도 지사 선거에 출마한 고이케 유리코 현 지사(왼쪽)와 렌호 참의원(상원) 의원/연합뉴스

후보 난립 문제와는 무관하게, 2024 도쿄도지사 선거는 자민당 등 여당 지지를 받는 고이케 유리코(72) 현 지사와 입헌민주당 등 야당 지원으로 출사표를 던진 연예인 출신 정치인 렌호(蓮舫·57)의 대결 구도로 굳혀지고 있습니다. 일본 정치권에선 이례적인 두 여성 정치인의 빅매치입니다.

3선에 도전하는 고이케 지사는 코로나 대책과 육아 지원 등 8년간의 실적을 홍보하며 “도민 생명과 경제를 지키겠다”고 공언하고 있습니다. 렌호 후보는 저출산 해결 공약을 전면에 내세우는 한편 최근 소속 의원들의 비자금 스캔들로 지지율이 하락한 집권 자민당을 직격하며 “자민당 천하를 끝내자”고 호소하고 있죠.

내달 일본 도쿄도지사 선거에 입헌민주당 등 야당 지원으로 출마한 렌호(蓮舫·57)/주간 다이아몬드 온라인

우익 성향인 고이케와 달리, 렌호는 1923년 발생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등 유언비어가 퍼져 학살된 조선인 추도식에 도지사 명의의 추도문을 보내겠다고 최근 밝혔습니다.

'도쿄 타워'가 보이는 일본의 수도 도쿄의 전경/조선일보DB

6월 26일 44번째 방구석 도쿄통신은 제도를 악용한 정치 단체의 횡포로 도쿄도지사 선거가 아사리판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다음 주에 다시 일본에서 가장 핫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42~43편 링크는 아래에서 확인하세요.

웨딩 촬영하러 한국 원정 떠나는 日예비부부들 ☞ 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4/06/12/N3Q5FFCPWVA77D2JQPO2XDXS44/

혐한인가 아닌가… 쓰시마에 걸린 ‘한국인 출입금지’ 팻말 ☞ 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4/06/19/4OXDFE2Q5FACFG34ALYZJI5BJY/

‘방구석 도쿄통신’은 매주 수요일 연재됩니다. 관심 있는 분이라면 하단의 ‘구독’ 링크를 눌러주세요. 이메일 주소로 ‘총알 배송’됩니다.

이번 한주도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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