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북∙중 밀월 징표' 김정은 발자국 동판, 중국서 사라졌다

정영교 2024. 6. 11.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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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8일 중국 다롄을 찾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산보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중국 신화망]

2018년 5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중국 다롄(大連) 방문 당시 시진핑 (習近平) 국가주석과 산책하며 친교를 쌓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알려진 ‘발자국 동판’이 최근 제거된 것으로 파악됐다.

10일 복수의 소식통에 따르면 당시 김정은과 시 주석이 산책하며 담소를 나눈 다롄 외곽 휴양지 방추이다오(棒槌島) 해변에 있던 발자국 동판을 지금은 찾을 수 없다. 대북 소식통을 통해 중앙일보가 입수한 최근 사진에 따르면 동판이 있던 자리에는 검은색 아스팔트콘크리트로 덮은 흔적만 남았다.

중앙일보는 과거 동판이 설치돼 있는 사진도 입수했는데, 같은 곳을 향하는 두 쌍의 발자국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중국 측이 따로 동판 설치와 관련한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적은 없지만, 현지에서는 김정은과 시 주석이 산책한 것을 기념해 두 정상의 발자국을 본따 만든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으로 미뤄 외교가에선 북·중 양국 정상의 발자국을 지운 건 시 주석의 승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해당 사안에 정통한 현지 소식통은 "중앙에서 지시가 내려와 제거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또다른 소식통은 "방추이다오 해변 인근 식당의 '7호각 전시실'도 폐쇄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해당 전시실에는 김일성, 김정일이 방추이다오를 방문했던 당시 사진 등이 전시돼 있어 김정은도 방문했던 곳"이라고 말했다. 발자국 동판과 전시실 폐쇄의 정확한 시점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현지에서도 이 같은 일련의 조치가 통상적이지는 않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고 한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런 변화는 북·중 관계에 문제가 있거나 어떤 이유에서든 더이상 동판을 유지·관리할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5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산책을 하며 담소를 나눴던 다롄 외곽 휴양지 방추이다오 해변에 설치된 양 정상의 발자국 동판(왼쪽)과 동판이 철거된 모습(오른쪽). 대북소식통 제공

당시 북·중 간 만남의 상징성을 고려하면 이런 의구심은 더욱 짙어진다. 김정은은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1차 북·미 정상회담(2018년 6월12일) 직전 다롄을 전격 방문했다.(같은 해 5월 7~8일) 사실상 '작전회의' 격이었다. 전용 열차가 아닌 전용기(참매-1호·IL-62M) 편으로 방중 길에 오른 김정은은 공식회담-환영 만찬-방추이다오 해변 산책-오찬으로 이어진 빡빡한 일정을 시 주석과 함께 소화했는데, 하이라이트는 해변 산책이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8년 5월 다롄 외곽 휴양지 방추이다오 해변에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오른쪽). 왼쪽은 방추다이오 해변에 설치됐던 양정상의 발자국 동판과 김정은 발자국 동판을 확대한 모습. 대북소식통 제공

당시 두 정상은 통역만 대동한 채 나란히 걸으며 친분을 과시했다. 방추이다오는 마오쩌둥(毛澤東) 시절부터 중국 지도자들이 정상급 외국 인사와의 회담이나 휴양을 위해 찾던 곳이다. 김정은의 할아버지인 김일성 주석도 여러 차례 방문했다. 김정은과 시 주석의 '산책 외교'가 이 곳에서 이뤄진 배경이기도 하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6월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 방문 당시 방추이다오(棒槌島) 7호각 전시실에 있는 김일성 주석의 과거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조선중앙TV 캡처, 연합뉴스

중국 관영 CCTV는 두 정상의 방추이다오 해변 산책 장면을 반복적으로 방영하면서 시 주석의 '소프트 외교'를 부각하기도 했다.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김정은은 북·중 관계를 "새로운 전성기"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로 표현했고, 시 주석은 "두 나라는 운명공동체, 변함없는 순치의 관계"라고 화답했다.

이처럼 북·중 관계의 완전한 복원을 상징하는 정상 간 만남이 이뤄진 장소에서 동판이 사라지고 전시실이 폐쇄된 것을 두고 양국 간 이상 기류가 흐르는 징후로 보는 시각도 있다.

노동신문이 2018년 5월 9일 게재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 방문 사진.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정은이 8일 다롄 동쪽 외곽 해변에 있는 방추이다오(棒槌島) 영빈관에서 시 주석과 만나고 있다. 노동신문, 뉴스1

실제 북한 외무성은 지난달 27일 한·일·중 정상회의 직후 중국까지 싸잡아 비판하는 담화를 내는 등 이례적 태도를 보였다. 북한은 같은날 심야에는 군사정찰위성 발사를 감행했다. 김정은이 중국을 향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 가능한 대목이다.

이와 관련, 외교 소식통은 "북·중 수교 75주년을 맞는 해인데도 중국의 태도가 굉장히 빡빡하다고 북한은 보고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또 지난 4월 자오러지(趙樂際)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장 방북과 관련해 "당시에도 서열 3위가 가긴 했지만, 사실상 선물은 없었기 때문에 북한의 불만이 컸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이 지난해 11월 미·중 정상회담에서 미국과 충돌 방지를 위한 '가드레일' 구축에 합의하는 한편 최근 들어 부쩍 한국과 일본, 일본 등 미국의 동맹국들과 관계 관리에 나서는 것도 김정은으로서는 조바심을 낼 수 있는 지점이다. 중국은 불법 무기 거래를 축으로 하는 북·러 간 밀착에도 어느 정도는 거리를 두고 있다.

지난 2022년 11월 14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만난 조 바이든(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왼쪽) 중국 국가주석. 오는 15일 두 정상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갖는다고 지난 주말 양국 외교당국이 발표했다. AP, 연합뉴스

이는 본질적으로 북한과 중국이 혈맹이자 전통적 우호 관계이지만, 한·미 동맹 같은 가치 동맹과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당대당 교류를 기반으로 이념을 공유하면서도 각기 이해에 따라 관계의 우선순위 설정을 달리 해온 게 사실이다.

지난 2013년 3월 시 주석 취임 직후 중국은 북한보다 한국에 더 밀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2016년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결정으로 한·중 관계가 급전직하하긴 했지만, 그 전만 하더라도 시 주석은 전례를 깨고 북한이 아닌 한국을 먼저 방문했을 정도다.(2014년 7월) 시 주석과 김정은 간 정상회담은 2018년, 시 주석의 방북은 2019년 6월에야 처음 이뤄졌다.

정영교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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