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겹 벗겨진 ‘경주 왕릉’ 경악…1500년 무덤 공식 뒤흔들다

노형석 기자 2024. 6. 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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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서악 고분군 법흥왕릉 추정 묘 발굴
‘5세기 돌무지덧널무덤, 6세기 돌방무덤’
이 정설과 달리 돌무지덧널무덤 흔적 확인
서악고분군 4호분의 봉분 서북쪽 모습. 지난 4~5월 정밀발굴조사를 통해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에서 주로 보이는 2단으로 된 호석들과 받침석, 외도의 흔적이 드러났다. 정인성 영남대 교수 제공

경주의 신라 큰 무덤들 일부가 조만간 열릴 조짐이다. 어떤 유적과 유물들이 나올까. 금관일까. 금척일까. 돌무지덧널일까. 돌방일까.

신라 고도 경주가 요즘 술렁인다. 최근 시내 서쪽에 자리한 신라 대형고분들이 획기적인 발굴 소식을 알리며 문화재학계에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2년 전 태풍 힌남노가 한반도를 내습할 당시 강풍과 폭우로 봉분 일부가 무너진 경주 서악동고분군 최대의 왕릉급 무덤인 4호분에서 지난 4~5월 복구 정비를 위한 발굴조사를 벌이다 학계의 통설을 깨는 무덤 얼개가 확인된 것이다. 첨예한 논란과 더불어 학술발굴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하고 있다.

시 외곽 건천읍 금척리고분군에서도 국가연구기관이 나서 해방 이래 처음으로 학술적 목적의 대규모 기획 발굴조사에 착수했다. 고대유산의 메카 경주에서 1970년대 이후 50여년 만에 대형 고분 발굴조사가 본격화되는 양상이 보인다. 학계는 자못 흥분된 분위기다.

무너진 봉분서 삐져나온 돌만으로 학계 전율

서악동고분군은 신라 왕릉급 고분군의 양대 축으로 꼽힌다. 마립간이라고 자신을 칭하던 5세기 왕들의 무덤떼로 추정되는 대릉원에 이어 6세기 경주 서쪽 선도산 인근 기슭에 잇따라 조성됐다고 학자들은 이야기하는 유적이다.

최근 발굴이 진행된 서악동 고분군 4호분의 모습이다. 매장문화재조사기관인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은 지난 4월15일부터 보름가량 태풍으로 무너진 4호분 봉분 북서쪽 단면의 정밀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지난달 3일엔 현장설명회를 열어 2단의 호석들이 밀집된 상태로 받침석과 함께 드러난 조사현장을 학계 관계자들에게 공개했는데, 이후 고고학계에서 무덤 성격을 둘러싸고 첨예한 논란이 시작됐다. 정인성 영남대 교수 제공

극단적인 기후변화로 2년 전 발생한 태풍 힌남노 덕분에 신라 왕릉급 고분의 무덤 얼개를 둘러싼 논란의 물꼬가 터졌다. 2022년 서악동 고분군의 4호분 북서쪽 봉분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과정에서 현장 시찰을 나온 한 문화재 위원이 무너진 봉분에서 삐져나온 호석으로 추정된 돌들의 모양새를 보고 발굴조사를 조언한 것이 계기였다.

서악동 4호분은 그동안 법흥왕릉으로 추정되어온 대형 왕릉급 무덤으로 그동안 한번도 온전한 조사를 벌인 적이 없었다. 매장문화재조사기관인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은 지난 4월15일부터 보름가량 무너진 4호분 봉분 북서쪽 단면의 정밀발굴조사를 진행한 뒤 지난달 3일엔 현장설명회를 열어 2단의 호석들이 밀집된 상태로 받침석, 외도 등과 함께 드러난 조사현장을 학계에 공개했다.

이후 고고학계에서 무덤 성격을 둘러싸고 첨예한 논란이 시작됐다. 조사결과가 경악할 만한 파격적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달 30일 오후 촬영한 경주 금척리 고분군. 지난달 27일부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학술발굴에 착수했다. 현재까지 모두 53기의 크고 작은 고분들이 파악되는 이 유적은 경주 외곽의 고분군들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유적으로 경주 도심의 대릉원 고분들과도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이란 추정이 제기되어 왔다. 노형석 기자

그간 서악동 고분군은 6세기 중반 이후의 돌방(석실)무덤으로, 돌무지덧널무덤인 전대 5세기의 마립간 시기 왕릉급 무덤들이 있는 대릉원과는 두부모 자르듯 구분된다는 게 기존 학계의 단정적인 견해였다.

그런데 이런 기존의 예상을 깨고 시내 대릉원에서 볼 수 있는 돌무지덧널무덤의 흔적인 2개의 단으로 촘촘하게 쌓은 호석층의 돌무더기들이 확인돼 학계 관계자들을 경악시킨 것이다. 신라의 무덤 역사에서 돌무지덧널무덤이 시내 외곽의 산기슭의 6세기 석실 무덤으로 변모한다는 게 그동안의 확고한 역사적 통설이었는데, 통째로 이런 가설이 흔들리게 되었다.

물론 석실분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여전히 만만치 않다. 적석목곽분 무덤의 전형적인 호석(봉분 주변을 감싼 석물)이 나왔지만 시내 신라의 왕릉급 적석목곽분 무덤 둘레에서 나오는 제사용 항아리를 파묻은 흔적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또 무덤 주위에서 나온 토기 연대가 6세기 중후반이란 점, 발굴하지 않은 서악동 고분군을 빼면 6세기 중후반 한반도 곳곳의 신라무덤은 대부분 석실분이란 점도 여전히 유력한 근거다.

무덤방 주위로 돌무더기를 한가득 쌓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인 대릉원의 무덤들과 서로 얼개가 어떻게 연결됐는지를 규명할 수 있는 단서가 열린 만큼 학계 관계자들은 대부분 서악동 고분군의 본격적인 학술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서악고분군 4호분의 정밀발굴조사로 드러난 봉분 서북쪽 아래쪽의 단면.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에서 주로 보이는 2단으로 된 호석들과 받침석, 외도의 흔적이 드러났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실제로 학계의 논쟁이 심화되자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 관계자들은 70년대 천마총 발굴 이후 50여년 만에 왕릉급 무덤인 4호분의 재발굴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김대환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사를 비롯한 일부 소장 연구자들은 1817년 추사 김정희가 최초로 서악동 고분을 답사해 주요 봉분의 주인공을 진흥왕, 진지왕, 문성왕, 헌안왕 등으로 구분해 ‘신라진흥왕릉고’란 기록을 남겼다는 점에서 한국 고고학사의 뿌리를 새롭게 되찾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는 평가도 내놓고 있다.

해방 이래 최초의 학술발굴 서막…모량부 실체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지난달 27일부터 발굴팀을 꾸려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한 금척리 고분군은 신라 초기 행정조직체제인 6부 가운데 모량부의 근거지인 건천 지역에 있는 대형고분군이다. 경주 도심 대릉원, 노동·노서동 고분군의 유명한 고분들과 거의 비슷한 모양새와 구조를 지녀 왜 이 고분군만 경주 도심에서 떨어져 나왔는지, 모량부의 실체는 무엇인지를 놓고 오랜 의문을 자아냈던 유적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발굴의 필요성이 제기됐던 역사를 갖고 있는데, 해방 이후 사상 처음 유적의 역사적 의미를 규명하기 위한 학술발굴을 시작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현재까지 모두 53기의 크고 작은 고분들이 파악되는 이 유적은 경주 외곽의 고분군들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유적으로 경주 도심의 대릉원 고분들과도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이란 추정이 제기되어 왔다.

지난달 30일 금척리 고분군 조사현장. 인부들이 무덤 사이 땅의 표면층 일부를 걷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노형석 기자

고분군 중 동쪽 고지대에 있는 표주박 모양의 표형분인 48호분이 유력한 발굴 대상 유적으로 지목된다. 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돌무더기가 중첩된 적석목곽분 유적이기 때문에 일본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여러 도굴범들의 침입을 받았으나 무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동관이나 유리 유물 같은 여러 고급 부장품들이 나올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경주/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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