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간 그린 물방울… 똑같은 모양은 없다
갤러리현대서 6월 9일까지
물방울은 마흔 넘어 찾아왔다. 서울대 미대를 중퇴한 김창열(1929~2021)이 뉴욕을 거쳐 파리 근교 마구간에서 살 때였다. 1971년 어느 날 아침, 재활용하려고 물을 뿌려둔 캔버스에 맺힌 물방울이 보였다. 크고 작은 물방울이 햇빛에 반사되는 순간 찬란한 그림이 되는 감동을 그는 후에 이렇게 회고했다. “캔버스를 뒤집어 놓고 직접 물방울을 뿌려 보았어. 꺼칠꺼칠한 마대에 매달린 크고 작은 물방울의 무리들, 그것은 충분히 조형적 화면이 성립되고도 남질 않겠어. 여기서 보인 물방울의 개념, 그것은 하나의 점이면서도 그 질감은 어떤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는 새로움의 발견이었어. 점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감도(感度)라 할까. 기적으로 느껴졌어.”(‘공간’ 1976년 6월호)
‘물방울 화가’ 김창열 작고 3주기를 맞아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김창열 개인전 ‘영롱함을 넘어서’가 열리고 있다. 마대 위 물방울이 처음 탄생한 1970년대 초반 작품부터 2010년대 제작된 근작까지 김창열의 예술 여정을 회고하는 주요 작품 38점을 소개한다.
물방울 이전 상흔이 있었다.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나 16세에 월남한 그는 검정고시로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으나 6·25 전쟁으로 학업을 멈췄다. “중학교 동기 120명 중 60명이 죽었다”고 생전 말했다. 참극 앞에서 목도한 좌절을 비정형의 회화로 풀던 그에게 운명처럼 물방울이 찾아왔다. 이듬해 파리에서 열린 ‘살롱 드 메’ 전시에서 물방울 회화를 세상에 처음 선보였다. 초현실주의 시인 알랭 보스케는 “(김창열의 물방울은) 최면의 힘을 갖고 있다”고 평했고, 절친이었던 화가 박서보는 1974년 그의 작업실에서 마주했던 물방울 작품을 보고 말했다. “사방의 벽이 온통 물방울로 가득 찼더군. 흘러내리면 집에 홍수라도 날 만큼 말이야. 아이 하나쯤 익사할 것만 같던데.”
이후 50년간 물방울만 그렸지만 같은 물방울은 없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영롱한 물방울, 맺혀 있지 않고 화면에서 흐르는 물방울, 문자와 결합한 물방울, 글자를 지워내는 물방울···. 끊임없이 변주를 거듭한 김창열의 물방울을 오롯이 체험할 수 있다. 먼저 1층 전시장에서 만나는 1970년대 초기 물방울은 중력을 거스른 채 맺혀 있다. 2층에 오르면 물방울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단순히 맺혀 있는 데 멈추지 않고, 표면에서 흐르고 흡수되는가 하면, 끈적이며 밀도 있는 물방울로 점도도 달라진다. 지하 전시장에선 글자와 결합된 ‘회귀’ 연작을 볼 수 있다. 새로운 재료를 탐구하다 다락방에서 묵은 신문 더미를 발견한 그는 신문 활자처럼 한자를 화면에 빼곡히 적었다. 어릴 적 천자문을 깨치던 경험을 녹여 물방울이 놓일 표면으로 우주 만물의 원리를 담고 있는 언어를 택한 것이다. ‘회귀’ 안에서도 다양한 실험을 거듭했다. 물방울은 표면의 글자를 확대하거나, 가리거나, 지워내기도 한다.
김창열의 물방울 연작을 1976년 국내에 처음 소개한 화랑이 개최하는 15번째 김창열 개인전이다. 도형태 갤러리현대 대표는 “김창열의 물방울은 그동안 수행, 성찰, 회귀, 그리고 전쟁으로 죽어간 많은 영혼에 대한 레퀴엠 등 다양한 서사를 품은 은유적 언어로 해석돼 왔다”며 “이번 전시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던 본질, 그가 반세기 넘게 실험한 물방울의 다양한 표현과 조형 언어의 여정을 살피는 자리”라고 했다. 6월 9일까지. 무료.
☞김창열(1929~2021)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나 16세에 월남했다. 이쾌대가 운영하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웠고, 검정고시로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으나 6·25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뉴욕을 거쳐 백남준의 도움으로 1969년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가했고, 이후 파리에 정착한다. 1972년 파리에서 열린 살롱전에서 처음 물방울 회화를 선보인 후 50년간 물방울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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