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 풀라" 7억 쏟은 대치동 유리부스…중고생 의외 반응
지난 22일 오후 8시쯤,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로 불리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 거리. 운동복 차림에 커다란 책가방을 등에 멘 채 걸음을 재촉하는 수십 명의 중·고등학생들 사이로 불빛을 뿜어내는 투명한 유리 부스들이 눈에 띄었다. 강남구청이 지난 4월 설치한 일명 ‘스트레스 프리존’(프리존)이다. 대치동에 있는 프리존 5곳 중 한 곳인 ‘리프레시 테라피존’을 찾은 초등학교 5학년 A군은 “친구들끼리 저기 들어가서 누가 더 탕후루를 깨어 먹는 소리가 큰지 내기를 하는 게 유행”이라며 맞은 편의 부스를 가리켰다. 방음시설과 마이크 등이 갖춰진 ‘사운드 테라피존’이었다. 이날 오후 7시 30분부터 운영 마감 시간인 오후 10시 30분까지 이곳을 포함해 도곡로에 있는 프리존(4곳)을 찾은 사람은 A군과 친구를 포함해 초등학생·유치원생 5명이 전부였다. 그사이 수백명의 중·고등학생들이 부스를 지나쳤지만, 부스 안을 흘끔거릴 뿐 실제로 이용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프리존은 매일 학원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학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대치동 중·고등학생들을 위해 강남구청이 거리에 설치한 휴식공간이다. 학원 가기 전후 잠깐씩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민원에 따라 ‘통합형 휴게공간 설치 프로젝트’를 시작, 대치동 일대에 총 5개 부스를 만들었다. 의자에 앉아 간식을 먹으며 쉴 수 있는 ‘리프레시 테라피존’ 3개소, 마음껏 소리를 지르거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사운드 테라피존’ 1개소, 실내자전거를 타거나 운동을 할 수 있는 ‘피트니스 테라피존’ 1개소다.
프리존 5곳 설치 등 해당 사업을 진행하는데 초기 예산 6억 8000만원이 들었고, 냉난방 기기나 CCTV 가동 등을 위한 예산도 지속적으로 투입된다. 하지만 이용률은 저조했다. 운영 시작 후 2달여간 5개 부스의 하루 평균 이용객을 다 합쳐도 100명을 넘기기 어려울 만큼 학생들에게 외면 받았다. 사전에 대면 인증을 통해 출입 스티커를 발급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어 불편하고, 유리 부스를 통해 밖에서 안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을 만큼 개방돼 있어 이용하기 꺼려진다는 점 등이 문제로 지적됐다.
주민들 사이에서 ‘세금 낭비’나 ‘전시 행정’과 같은 비판까지 나오자, 강남구는 스티커를 발부받지 않아도 휴대전화 QR코드 인증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개선하고, 외부 시야를 차단하기 위해 부스 유리 벽에 스티커를 붙였다. 또 부스 운영 시간도 오후 2시~9시에서 12시 10시 30분으로 늘렸다. 이후 강남구는 “여러 개선 덕분에 한 달간 하루 평균 이용자가 전달 90명에서 8월에는 135명으로 증가했다”는 취지의 보도자료를 내며 성과를 홍보했다. 강남구청 관계자는 “9월 통계를 보니 프리존 이용자가 한 개 부스 당일 평균 77.6명으로 급증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프리존의 주 이용자로 설정된 인근 중·고등학생들의 반응은 여전히 차가웠다. 부스 인근에서 만난 중학교 3학년 B양은 “쉼터 내부가 너무 투명하다. 차라리 시간이 나면 스카(스터디카페)에 갈 것 같다”고 말했다. 부스엔 시야 차단용 스티커가 붙어 있긴 했지만, 여전히 길 건너편에서도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이용 방법을 몰라서 들어갈 생각도 못 했다”는 반응도 많았다. 중학교 2학년 C군은 “밤 10시에 보면 가끔 들어가서 폰을 만지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긴 한다”면서도 “학원 수업 중간에 시간이 있으면 친구들이랑 편의점에 주로 간다. 굳이 QR코드까지 신청해서 (프리존을) 이용하는 친구는 한 명도 못 봤다”고 말했다.
대신 오후 7시 30분쯤 엄마 손을 잡은 8살·7살 남자아이 두 명이 익숙한 듯 부스 쪽으로 다가섰다. 아이들은 출입 스티커를 찍고 들어가 부스 안에 놓여 있던 인형 등을 서로 던지며 놀았다. 이 부스 저 부스를 옮겨 다니며 술래잡기를 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아이들과 함께 있던 어머니 D씨는 “부스 내부에 있던 출입 스티커를 친구가 나눠줬다고 하는데, 그 후로는 부스에서 노는데 재미가 들린 것 같다. 자주 온다”면서 “나도 강남구에 살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세금 낭비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후로도 초등학생 남학생 1명이 잠시 방문한 것 외에는 아무도 프리존을 찾지 않았다. 오후 10시쯤 학생들을 태우러 온 차량 행렬을 정리하기 위해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고 각 학원 건물에서 인파가 쏟아져 나왔지만, 부스에 눈길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재수생이라고 밝힌 한 여학생은 “밤 10시까지 종일 학원에 있기 때문에 이 부스가 있는지도 몰랐다”며 부모님 차에 올랐다.
강남구는 “홍보를 강화하고 문제점을 개선해 활용도를 높이겠다”는 입장이다. 구청 관계자는 “청소년들이 우발적인 행동을 벌일 수도 있고, 룸카페 등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다는 언론 보도도 많아 유리 부스에 스티커를 부착할 때도 얼굴과 다리 등 노출이 민감한 부분만 보이지 않게 보완한 것”이라며 “접근성 문제는 담당 부서에서도 인식하고 있고, 홍보 영상 제작 등 대안을 마련 중이다. 이용객을 늘리기 위해 스티커를 부스 내부에도 비치해 뒀다”고 말했다.
신혜연 기자 shin.hye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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