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탈해간 고려불화가 식민 잔재 ‘반도 미술’이라고?

노형석 2023. 10. 9.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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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의 시사문화재]노형석의 시사문화재
폄하 속내 드러낸 일 규슈의 고려조선 명화 잔치
규슈국립박물관 4층 문화교류전시실 11실에 ‘숭고한 믿음의 아름다움’이란 제목 아래 마련된 고려 조선시대의 불교미술 특집전 전시장 입구. 전시의 대표작인 일본 가가미신사 소장 수월관음도 실물이 안쪽의 대형진열장에 내걸린 모습이 보인다. 그 앞 정면에 이 불화 이미지를 확대한 대형 전시 패널판 설치물이 놓여져있다. 노형석 기자

‘반도(半島)에서 유래한 불교회화’라고?

일본 불교미술사학계의 권위자라는 이데 세이노스케 규슈대 교수의 글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는 너무도 당당하게 식민지시대 조선을 비하한 멸칭을 최근 나온 학술논문에 구사하고 있었다. 그것도 최근 일본 규슈국립박물관에서 펴낸 고려·조선 불화 특집전시의 공식 도록 첫머리를 수놓는 개설 성격의 총설 제목으로 말이다.

14세기 중엽 왜구가 약탈해 일본 규슈 가라쓰 가가미 진자에 봉안한 것이 분명한 고려 불화의 대표작 수월관음도를 표지에 인쇄한 이 도록에서 그는 고려와 조선의 불교회화를 ‘반도(半島)’를 고향으로 두고 유래한 회화’라고 썼다. 우리는 흔히 반도란 말을 지리 용어로 쓰지만 사실 이 말은 19세기 메이지유신 이래 영어의 ‘페닌슐라’(peninsula)를 한자로 번역한 말이면서 아울러 구한말과 식민지 시대 내지로 불렸던 일본 본토와 식민지 조선을 차별하는 단적인 멸칭이기도 했다. 지금도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반도인’이라는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호칭에 치를 떠는 것도 바로 그런 역사적 아픔 때문이다.

국내 미술사 연구자와 애호가들의 큰 관심 속에 규슈국립박물관에서 9월5일부터 10월15일까지 열리고 있는 특집전시 ‘숭고한 믿음에 아름다움-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불교미술’은 이런 이면의 사정 때문에 마냥 감탄만 하면서 볼 수 없었다. 2010년 10월 700년 만의 해후라는 구호 아래 사상 처음 국내에서 불화의 잔치를 열었던 국립중앙박물관의 고려불화대전은 현재 일본에 130여점, 미국·유럽·국내에 30여점밖에 없는 작품들의 40%인 불화 61점을 전시한 바 있다. 13년 만에 일본에 차려진 이번 불화 잔치에는 그만큼은 아니지만 30점 넘는 작품이 나왔다.

역대 고려불화 가운데 가장 큰 대작인 일본 가가미진자 소장품인 세로 4m를 넘는 ‘수월관음도’가 특제 진열장에 내걸렸고, 조선 초기 불화 최고의 명품 중 하나인 일본 교토 지온인 소장 ‘32관음응신도’ ‘관경십육관변상도’, 후쿠오카 혼카쿠지 소장 ‘석가탄생도’, 히로시마현 후도인 사찰 소장 ‘만오천불도’ 등 13세기~16세기 고려 중기부터 조선 초기에 걸친 뛰어난 작품들이 30점 넘게 줄줄이 모였다. 고려 조선 불교미술에 면면히 흐르는 기법과 양식적 전통, 두 시대 불화의 차이를 살핀다는 전시 취지를 내놓았고 이에 부합하는 작품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기획전시실이 아닌 4층 문화교류실의 일반 전시공간 두 칸에 수월관음도류와 다른 불화류를 나눠 배치하면서 일본 문화교류사의 일부분으로 이 전시를 포함시킨 미술관 쪽의 큐레이션이나 전시를 뒷받침한 일본 전문가들이 논고에서 주장한 내용을 보면 단순한 선의로만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도록의 개설글 제목을 ‘반도 유래의 불교 회화…’로 기재한 것은 물론이고 8~9일 현지에서 열리는 기념 심포지엄 제목도 ‘반도유래 문물을 고찰하다’로 정하는 등 식민지 시대의 전형적인 표현을 썼다는 점이 일부 한국 연구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반도’란 말은 지난 수십년간 한일 교류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극히 조심하며 쓰지 않았던 용어란 점에서 충격적이라는 말이 나온다.

또 하나 공분을 사는 건 고려불화 전문가로 알려진 일본 학자 이데의 노골적인 한국 비하적 관점이다. 출품작 구성과 도록 편집을 주도한 이데는 총설에서 고려 불화가 무로마치 시대 일본 유한층의 중국풍 그림 감상 시스템의 일부로서 중국 화원들의 이름이 쓰여져 있는 완상 문화의 일부분이라는 주장도 했다. 하지만 고려 조선의 불화는 감상용이거나 선물용이 아니다. 대부분이 왕실과 귀족에서 특정인을 추모하거나 안녕을 기원하는 간절한 발원이라는 특정 목적 아래 만들어졌기에 선물로 줄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국내에는 불화가 거의 남아있지 않고 일본 진자나 지온인 등 다수의 일본 절, 신사에 불화가 흩어진 것은 고려말과 16세기 임진왜란 당시 왜구의 노략질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이런 유입 경위에 대한 사료적 접근은 외면한 채 왜구의 약탈로만 일본에 불화가 유입된 경위를 설명하는 것은 단락적(短絡的)’이라고 했다. ‘단락’은 생각이 얕고 짧다는 뜻의 일본식 조어다. 미술사연구에서 작품의 유입, 이동 경위를 밝히는 것이 필수적이고 그에 따라 왜구의 침탈을 주된 동인으로 언급할 수밖에 없는데도 이를 가해국의 연구자가 되려 단견이라고 공박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학계 사정에 밝은 국내 학계의 한 중견 연구자는 “지난해 강제동원 문제와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해 저자세 굴욕이란 비판을 받으면서 한일 관계가 정상화한 뒤로 학계에도 과거에는 삼가고 쓰지 않던 반도 같은 용어들을 쓰고 교류사 쪽에서 우파적인 논리와 개념을 좀 더 과감하게 구사하는 경향이 은연중 나타나고 있다”면서 “‘반도’란 말이 앞으로 상용적으로 쓰일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후쿠오카 미술관 1층 고미술기획전시실에서 지난달 13일 개막해 10월22일까지 열리고 있는 ‘조선시대의 회화’ 전 현장도 개운치 않은 구석이 보인다. 중국회화사 전문가인 이타쿠라 도쿄대 교수가 기획한 이 전시는 불화전 못지않게 화제를 모으는 조선 초기 회화들의 발굴 전시회라고 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 초기 회화에 대해 연구해온 국내 학자들과 충분한 교감 없이 기존 중국 회화의 양상과 다른 면모를 보이는 작품들 상당수를 조선 초기의 것들로 단정적으로 지목해 논란의 소지를 키웠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겨레가 지난 2016년 일본 야마토 분가칸 전시를 취재해 당시 국내에 처음 소개한 북송대 대가 이곽파의 화풍을 본떠 그린 산수도가 대표적인 사례다. 처음 공개한 뒤부터 7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지만 한일 학자들 사이에 본격적인 분석과 교감도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조선 초기 그림으로 단정했다는 비판을 피하긴 어려워 보인다.

8~9일 현지에서 열리는 한일 미술사학자 심포지엄이 이런 오해와 비판을 불식시키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후쿠오카/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후쿠오카 미술관의 기획전 ‘조선왕조의 회화 산수·인물·화조’의 전시장 들머리. 안쪽에 일반 관객에게 처음 소개되는 조선초기 제작 추정 산수화들이 줄줄이 내걸린 모습이 보인다. 노형석 기자
지난 2016년 일본 야마토문화관의 전시회에 처음 공개됐을 당시 전시도록에 15세기 조선에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고 명기됐던 대작 산수화의 도판. 이 그림을 당시 처음 소개한데 이어 올해 후쿠오카 미술관 전시에도 내놓은 이타쿠라 도쿄대 교수는 중국 북송시대 이곽파 화풍의 특징이 조선 초 화풍과 어우러진 수작이란 견해를 내놓았다. 15세기 한일 국적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화가 문청의 도장이 오른쪽 윗부분에 찍혀 있다. 야마토문화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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