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탁신의 부활·피타의 좌절…험난한 태국 민주화
(방콕=연합뉴스) 강종훈 특파원 =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는 태국 현대사를 뒤흔든 인물이다. 지난 20여년간 그는 태국을 상징하는 정치인이었다.
2001∼2006년 총리를 지낸 그는 쿠데타로 실각하고 망명 생활을 해왔지만, 해외에서도 태국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레드 셔츠'로 불리는 지지 계층은 그를 우상으로 받들며 추종했고, 그의 대리인들이 이끈 정당은 선거에서 지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지난 5월, 철옹성 같던 탁신의 '불패 신화'가 무너졌다.
총선에서 개혁 성향 전진당(MFP)이 탁신의 프아타이당을 누르고 제1당에 올랐다.
젊은 세대의 전폭적인 지지로 방콕 33개 선거구 중 32개를 휩쓰는 등 돌풍을 일으켰다.
태국은 물론 세계를 놀라게 한 이변이었다.
'하버드 출신의 40대 엘리트 개혁 기수'라는 수식어가 붙는 피타 림짜른랏 전진당 대표는 신드롬 수준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군부 시대를 끝내고 태국을 새롭게 바꿀 젊은 지도자가 탄생하는 듯했다.
어느덧 70세를 훌쩍 넘은 탁신의 시대는 저물어가는 것으로 보였다.
총선 후 100여일이 지난 지금, 태국의 과거와 현재를 대표하는 두 정치인의 운명은 다시 엇갈렸다.
피타는 좌절했다.
군부 등 보수 세력의 반대로 집권에 실패했고, 선거법 위반 논란 속에 의원직도 정지됐다.
군주제 개혁, 군 개혁 등을 추진하려 했던 전진당은 국민들의 가장 많은 선택을 받고도 야당으로 남게 됐다.
탁신은 부활했다.
프아타이당은 2000년대 들어 처음으로 선거에서 제1당 자리를 내주고도 정권을 차지했다. 함께 손잡고 집권하려 한 전진당을 '배반'하고 군부 진영과 손잡은 결과다.
측근인 세타 타위신이 총리로 선출된 지난 22일, 해외 도피 생활을 해온 탁신은 전용기를 타고 15년 만에 유유히 귀국했다. 곧바로 수감됐지만 몇시간 만에 경찰병원 VIP 병실로 옮겼다.
군부 측과의 '은밀한 거래'로 사면은 시간문제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탁신과 피타가 처한 상황은 태국 정치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기득권 세력 권력자들의 야합으로 정권이 탄생했고, 농락당한 꼴이 된 국민들의 표정에서는 분노를 넘어 체념하는 듯한 기색마저 읽힌다.
관전자 입장에서는 전진당이 왕실모독죄 개정 공약을 거두고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하는 궁금증도 있지만, 보수 세력은 다른 어떤 이유를 내세워서라도 전진당의 집권을 막았을 가능성이 크다.
범민주 진영 최대 정당이었던 프아타이당과 군부가 연대하면서 태국 정치 지형은 한순간에 '군부 대 탁신'에서 '보수 대 개혁' 구도로 바뀌었다.
앞으로 프아타이당은 보수 세력의 대표 정당으로 자리매김할 확률이 높다. 전진당을 배신하면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선명한 개혁 노선을 가진 전진당의 존재를 고려하면 프아타이당이 민주 진영에서 지지받기는 어렵다.
군부와 경쟁했다는 이유로 그동안 민주 진영으로 분류되기는 했지만, 애초 프아타이당의 최우선 목표가 민주화도 아니었다. 탁신의 사면을 비롯한 탁신 가문의 부흥을 위한 정권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태국의 개혁과 민주화는 요원해졌다.
피타 대표는 총선 승리 이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번이 정치적 혼란과 악순환에서 빠져나와 태국을 진정으로 바꿀 수 있는 한 번뿐인 기회"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태국은 그 중대한 기회를 놓친 셈이 됐다.
민심과 동떨어진 정부가 구성됐고, 이들은 기득권 사수에 주력할 것이다.
의회에서도 전진당이 힘을 쓰기 어렵다. 연립정부에 참여한 정당들의 하원 의석은 314석으로, 전진당의 151석과 큰 격차가 난다. 전진당의 개혁 법안이 의회에서 통과되기 쉽지 않다.
개헌 논의가 이뤄지겠지만 민주적인 선거 제도가 마련될지는 미지수다. 탁신계와 군부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몰아갈 게 뻔하다.
분노한 민심이 차기 총선에서 전진당에 압도적인 승리를 안겨주고 피타가 총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려면 피타와 전진당이 그때까지 살아남아야 하지만, 이 또한 장담할 수 없다.
전진당의 전신인 퓨처포워드당(FFP)이 정당법 위반으로 해산되고, 타나톤 중룽르앙낏 대표의 정치활동이 금지된 예가 있다. 피타와 전진당도 머지않아 같은 운명에 처할 수 있다.
변화를 요구하는 태국 국민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기득권 세력과 민심 간의 간극도 벌어지고 있다.
doubl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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