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세상] 원전 오염수, 과학과 괴담 사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를 놓고 갑론을박 중이다. 요즘 오고 가는 발언 중에 매우 거슬리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과학’이다. 지난달 31일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관련 정부 시찰단의 브리핑 과정에서 평소 감정표현이 별로 없어 보이는 한덕수 국무총리가 마무리 발언으로 “굉장히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만족스러웠다”는 평가와 함께 “모든 검증의 기초는 과학이 돼야 한다. 과학에 기초하지 않은 정치적인 목적이나 이념에 의해 사람들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고 자꾸 생각하게 하는 것이 어민들을 굉장히 힘들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국민들의 걱정을 ‘괴담’이나 진영 논리로 깔끔하게 정리해버리는 이 태도는 과연 과학적일까.
쿠르트 레빈이라는 심리학자가 있다. 독일 사람으로 2차 세계대전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사회심리학의 아버지’ ‘현대 심리학의 선구자’라고 불린다. 심리학은 사람의 마음을 ‘과학적’으로 다루는 학문이다. 레빈의 탁월함은 인간의 마음이란 게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떤 환경과 어떤 배경에서 어떤 상황과의 상호작용에 따라 행동도 생각도 달라진다는 것을 밝혀낸 데 있다. 레빈은 사람이 생활하는 데 있어 특정 양식이 존재하는 추상적 공간을 ‘장(field)’이라 했다. 가정 내, 회사 내, 학교 내, 심지어 인터넷 공간까지 모두가 ‘장’이다. 레빈의 장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어떤 생각이나 행동은 맥락적 요소를 자기 방식대로 해석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선택하는 결과라고 보았다. 사람의 마음뿐 아니라 사회 현상도 맥락과의 상호작용의 결과라 보았다.
그러니까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각양각색일 수밖에 없다. 물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을 테고, 생계가 걸린 일이라 절박하게 항의할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다. 아기 이유식을 만드는 엄마들은 생선에 스며들 방사능 걱정이 먼저이겠고, 일본과 경제적으로 실리를 얻고 싶은 사람에겐 잠 못 이룰 숙제다. 이유야 어쨌든 후쿠시마 원전의 핵심이 녹아 있는 물을 바다로 흘려보낸다 하면 편안할 사람이 있기나 한 걸까. 잘 모르는 일이 대규모로 일어날 때 대개는 불안이 앞선다. 공직자가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불안감을 인정하고 해소시켜야지, 과학 운운하며 국민을 괴담에나 현혹되는 바보로 만들 일인가!
레빈의 장이론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개인이나 조직이 변화하기 위해 장애물을 극복하는 3단계가 필드에서 현실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첫 단계는 ‘해동(Unfreeze)’이다. 기존 업무 방식이나 문화가 완고한 상태를 풀어 변화를 수용할 준비를 하게 하는 단계이다. 두 번째는 목표로 한 변화를 ‘실행’하는 단계다. 세 번째는 재동결(Refreeze)로, 새로운 방식과 문화가 새로운 기준이 되도록 고착시키는 단계이다.
언 고기를 양념에 재우려면 녹이는 게 먼저다. 정부는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에 관한 ‘과학적 사실’이 국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되려면 불안과 의심으로 꽁꽁 언 마음을 어떻게 녹일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과학적 진실이 뒤집어진 역사도 많고, 객관적이라 해도 선뜻 믿어지지 않는 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침대만 과학이 아니라 마음이야말로 과학’이다. 당신들이 배워야 할 아주 복잡미묘한 과학이다.
이미경 환경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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