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포 다 뗀 한국 물가지수의 어쩔 수 없는 간극 [마켓톡톡]
주거비 충분히 반영 않는 韓 물가
전셋값 증가율 3분의 1만 반영
우리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4개월 만에 3%대로 하락했다. 하지만 석유류와 농산물을 제외한 근원물가는 여전히 4%대로 높다. 더구나 미국과는 달리 한국 물가에는 주거비가 제대로 반영돼 있지 않다. 국내 서민들이 체감하는 물가가 수치보다 더 높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통계청이 지난 2일 '4월 소비자물가지수'를 발표했다. 4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110.80으로 전년 동월 대비 3.7% 상승하며 지난해 2월 이후 14개월 만에 처음으로 3%대로 내려앉았다. CPI 상승률은 지난해 7월 6.3%를 기록한 이후 점차 상승폭을 줄여 5%대를 유지했고, 올해 2월에는 4%대로 내려왔다. 지난 3월 CPI 상승률은 4.2%였다.
■ 석유류 하락 반사이익=지난해 중순 이후 CPI가 꾸준히 하락한 것은 석유류 제품의 가격이 하락했기 때문이다.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 가격은 지난해 6월 배럴당 120달러를 넘긴 후 꾸준히 하락해 올해 3월 60달러대 초반까지 내려갔다.
OPEC+ 국가들이 기습적으로 감산을 결정하면서 WTI 선물 가격은 4월 초 배럴당 80달러 중반대까지 올라갔지만, 세계 경제의 침체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다시 하락해 3일 현재 배럴당 71.64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4월 국제 유가가 하락하면서 물가지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석유류 제품의 4월 물가상승률은 1년 전보다 16.4% 하락했다. 이는 35개월 만에 최대폭의 하락이다. 4월 농·축·수산물 물가상승률도 3월 3.0% 상승보다 안정되면서 1.0% 상승에 머물렀다. 농산물 2.0%, 수산물은 6.1% 상승했지만, 축산물은 1년 전보다 1.1% 내렸다.
다만, 개인 서비스 물가 수준은 여전히 높았다. 소비자물가지수는 12개 세부항목으로 구분되는데 이를 상품, 서비스 2개의 세부 항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상품 물가지수는 식료품·비주류음료, 주류·담배, 의류·신발 등에 해당된다.
서비스 항목들은 주택, 수도, 전기·연료나 음식·숙박 등으로 구성된다. 서비스 물가지수를 좌우하는 것은 주거비와 공공요금을 제외하면 대부분 임금의 수준이다.
이런 소비자물가지수의 맹점을 보완하는 지표가 근원 소비자물가지수(Core Consumer Price Index)다. 근원 물가지수는 경제에 일시적으로 가해지는 공급 충격을 제외하고, 경제에 장기간 영향을 줄 수 있는 물가를 측정한다.
소비자물가를 조사하는 품목 중에서 사람이 개입할 수 없지만 항상 영향을 주는 날씨, 외부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는 품목을 제외한다. 이를테면 농산물, 식료품, 에너지, 원자재 등이 해당된다.
■ 기준금리와 근원 물가지수=석유류, 농산물 등을 제외한 근원 소비자물가지수는 여전히 내려오지 않고 있다. 국내 4월 근원 소비자물가지수는 1년 전보다 4.6% 상승했다. 3월 4.8% 상승률보단 낮지만, 지난해 5월 4.1%를 기록한 이후 14개월째 4%대에서 점차 상승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을 적용한 식료품 및 에너지 제외 근원 물가지수는 4.0%로 지난해 8월 이후 9개월 동안 4%대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미국의 지난해 12월 소비자물가지수는 2020년 5월 이후 처음으로 하락세로 전환했지만, 미 연방준비제도(연준·Fed)는 근원 소비자물가지수 상승폭에 더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당시 연준은 집값이 다시 살아나면서 주거비로 인한 압박이 심해지는 것을 경계했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지난 2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 직후 "(주거비를 제외한) 근원 서비스 물가지수에서는 아직 디스인플레이션(물가하락)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며 금리 인상 기조가 계속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난 3월 미국의 근원 CPI는 1년 전보다 5.6% 상승해 전월보다 오히려 0.1%포인트 올라갔다. 미국의 4월 CPI는 오는 10일 발표된다. 토마스 바킨 리치몬드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지난 12일 "인플레이션이 확실히 정점을 지났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식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물가가 여전히 너무 높다"고 말했다.
에너지 가격이 안정세를 찾은 이후 연준은 주거비의 추이에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연준의 기준금리가 주택담보대출(모기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주거비는 전체 물가의 3분의 1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월세와 함께 집값 상승분도 물가지수에 포함한다.
올해 1월 미국의 CPI에서 주거비는 1년 전보다 7.9% 상승했지만, 집값의 하락세는 뚜렷했다. 집값 하락이 CPI에 반영되는 시차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연준은 근원 CPI 중에서도 임금 수준이 반영되는 서비스 물가지수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 한미 물가 차이와 주거비=한국과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는 지난해 3월 4.2%포인트(미국 CPI 상승률은 8.3%, 한국은 4.1%)라는 큰 차이가 났지만, 지난 4월 기준으로는 이 차이가 0.8%포인트 수준으로 좁혀졌다. 어쨌거나 양국의 소비자물가지수가 이렇게 차이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은행은 지난 3월 2일 '물가 여건 변화 및 주요 리스크 점검' 보고서를 통해서 한국과 미국의 서비스 물가를 비교했다. 보고서는 한국의 '개인 서비스 물가'와 미국의 '주거비 제외 근원 서비스 물가'를 비교하며 "최근 (한국의) 근원물가 상승률이 미국과 달리 근원물가와 노동시장 간의 평균적인 관계에서 다소 벗어났다"며 "노동시장 이외의 요인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한국과 미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의 격차는 '주택, 수도, 전기 및 연료' 항목에서 발생한다. 주택, 수도, 전기 및 연료 항목이 소비자물가지수를 몇 %포인트나 상승시켰는지를 나타내는 기여도는 두 나라간 큰 차이가 있었다.
보험연구원이 지난 4월 27일 발표한 '한국과 미국의 소비자물가 비교와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주택, 수도, 전기 및 연료 항목이 2022년 7월 소비자물가지수를 1.1%포인트 상승시켰지만, 미국에서는 같은 항목이 물가를 2.6%포인트 끌어올렸다. 올해 1월에는 이 차이가 한국 1.4%포인트, 미국 3.1%포인트로 더 벌어졌다. 이 차이가 두 나라의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 격차와 유사성을 갖고 있다는 게 보험연구원 보고서의 핵심이다.
물가지수의 차이는 한국과 미국은 물가지수에서 주거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한국의 물가지수 내 주거비 비중은 월세 4.4%, 전세 5.4%로 합쳐서 9.8%에 불과하지만, 미국은 주거비 비중이 32%로 3분의 1을 차지한다.
먼저, 미국은 자가 소유의 주택에서 살아도 주거비를 산정해 반영하지만, 우리는 월세와 전세만 반영한다는 차이가 있다. 또한, 한국의 경우 월세와 전세도 물가에 충분히 반영하지 않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해 4월 '임대 주거비 변화와 주택공급' 보고서에서 전세 가격이 소비자물가지수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며 "전셋값은 CPI 상의 증가율보다 실제 증가율이 3배 이상 높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CPI에서 전셋값 증가율이 2020년 0.3%, 2021년 1.9%였지만, KDI가 국토교통부 실거래가를 통해서 산출한 통합주거비지수에서는 2020년 3.9%, 2021년 7.3% 상승했다고 밝혔다.
통계청은 지난 1월 27일 게시한 '소비자물가 집세(월세·전세) 지수는 어떻게 작성되며 전세 시세 변동률과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집세는 소비자물가지수에서 거주하는 대가로 지불하는 비용"이라며 "전세도 계약기간 주택을 사용하는 대가로 매월 일정 비용을 소비 지출하고 있어 월세 개념과 동일한 방식으로 평균 금액의 변동추세를 반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정연 더스쿠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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