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양반 관료의 실제 생애 아닌, 추구했던 꿈·열망 담은 일대기[박정혜의 옛그림으로 본 사대부의 꿈]

2023. 2. 24.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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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혜의 옛그림으로 본 사대부의 꿈 <11> 평생도
돌잔치·글공부·혼인 의례·과거급제·지방관 부임·회갑연 등… 삶의 중요한 모습 8~12폭 병풍으로 그려
18세기 후반 이후 유행… 정승에 오르거나 자손이 번성하면 더없이 축복받은 인생 행로라 여겨 본보기 삼아
조선 말 화가 채용신이 자신의 인생을 시간 순서대로 그린 ≪채용신평생도≫. 그림은 전체 10폭 병풍 중 왼쪽부터 2폭 ‘혼례도’, 5폭 ‘사어용도’, 6폭 ‘신연도’, 9폭 ‘봉천은도’, 10폭 ‘회갑연도’. 견본채색. 국립중앙박물관.

동아시아 회화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그 나라에서만 유독 유행했던 주제나 형식의 그림이 있는가 하면 그 나라만의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독자적으로 창출되었던 종류의 그림이 있다. 한국에서는 조선 시대 18세기 후반 이후 유행한 평생도(平生圖)가 그중 한 가지다. 평생도는 조선 시대 양반 관료의 인생행로가 단계적으로 시각화된 그림이다. 처음에는 8장면으로 출발해 10장면, 나아가 12장면으로까지 확대되었는데 거의 모든 평생도가 병풍에 그려졌다는 점도 한국적인 특징이라 할 만하다.

평생도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두 작품인 ≪모당평생도(慕堂平生圖)≫와 ≪담와평생도(澹窩平生圖)≫는 이제 더 이상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의 작품이 아니며, 내용상으로도 모당 홍이상(洪履祥, 1549∼1615)이나 담와 홍계희(洪啓禧)의 실제 생애와 관계없는 것으로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다시 말해 평생도는 조선 시대 양반 관료들이 걷고 싶었던 이상적인 삶의 형태가 하나의 본보기로 담겨 있는 그림이다.

≪모당평생도≫는 평생도 병풍의 전형을 제시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문인 관료의 일생을 주제로 한 8폭의 평생도는 ①돌상 앞에서 돌잡이 하는 모습의 첫돌 ②초례를 올리러 가는 신랑행렬을 그린 혼인 의례 ③삼일유가로 표현되는 과거 급제 ④근무지로 출근하는 장면으로 그려지는 첫 벼슬 ⑤험한 산길을 넘어가는 수령 행차 장면의 지방관 부임 ⑥2품 이상 고관의 탈것인 초헌을 탄 모습을 그린 당상관 제수 ⑦정1품의 상징인 파초선을 대동한 정승의 귀갓길을 그린 정승 역임 ⑧자손에게 둘러싸여 초례를 재현하는 회혼례로 구성되는 것이 보통이다.

10장면이나 12장면일 때는 여기에 글공부, 소과 응시, 회갑, 회방, 치사 후의 안락한 노년 생활 중에서 몇 장면이 선택적으로 추가되었다. 장면 구성에서도 짐작할 수 있지만 이러한 인생 단계를 모두 거친 인물은 찾기 어렵다. 특히 정승을 지내고 회혼까지 맞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 시대 문인 관료들은 평생도에 그들이 희망하는 출세와 장수의 염원을 담아 일종의 길상적인 그림으로 향유했다.

문인관료의 일생으로 시작한 평생도의 수요는 점차 늘어났던 것 같다. 19세기 말 이후에는 무관의 평생도가 생겨났으며, 실제 한 개인의 일생을 사실적으로 엮은 평생도도 그려지고, 누구나 쉽게 구입할 수 있는 보급용 석판 인쇄의 평생도도 만들어졌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의 평생도를 꼽을 수 있다.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되었던 ≪채용신평생도≫ 10폭 병풍은 최근에 처음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반에게 공개돼 주목받았다.

채용신은 1900년 태조어진과 1901년 경운궁 선원전에 모실 칠조(七祖: 태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 헌종) 어진 모사에 주관화사(主管畵師)로 발탁돼 이름을 떨친 조선 말기의 직업화가다. 주로 전라도에 근거지를 두고 우국지사의 초상과 그 지역 인물의 초상화를 많이 제작했다. 그는 초상화 분야에 두각을 나타냈지만, 직업화가답게 초상화 외에도 고사인물화, 산수화, 화조화, 기록화 등 화목을 가리지 않고 폭넓게 주문에 응했다. 밀려드는 주문을 소화하기 위해 ‘채석강도화소(蔡石江圖畵所)’를 설립하여 이곳에서 아들, 손자의 도움을 받으며 작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채용신평생도≫에는 그의 실제 일생이 시간 순서에 따라 잘 시각화돼 있다. 제1폭은 8세 무렵 아버지를 스승으로 삼아 글공부를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입학도’이다. 제2폭은 31세(1880년)에 치른 혼례 모습을 그린 ‘혼례도’로 교배례(交拜禮) 순서가 그려졌다.

제3폭 ‘도문도(到門圖)’는 1886년 37세에 무과에 급제한 사실을 표현한 장면이다. 도문이란 홍패를 받아 본가로 돌아오는 것을 말하는데 가족들은 손님을 초대하여 급제를 자축하는 잔치를 벌였다. 그림에도 홍패를 멘 재인(才人)은 벌써 집에 당도했고 악사들이 앞장선 가운데 사모에 어사화를 꽂고 백마를 탄 채용신이 친지와 이웃의 환영을 받으며 집으로 향하고 있다. 제4폭 ‘수군연습도’는 42세(1891년)에 전남 고돌산(古突山)에 소모별장(召募別將)으로 부임하여 수군 조련에 참여한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제5폭 ‘사어용도(寫御容圖)’는 50세(1900년) 때 경운궁 흥덕전에서 태조어진을 모사했던 일을 재현한 장면이다. 고종과 순종이 지켜보는 가운데 채용신은 왕의 얼굴 묘사에 여념이 없고 수종화사(隨從畵師)로 보이는 사람들이 곁에서 일을 거들고 있다. 많은 관료와 호위군관이 모여 있고 문밖에는 고종과 순종이 타고 온 가마가 대기 중이다. 태조어진 모사는 그가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크게 얻은 계기가 되었던 이력으로 그의 일생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채용신은 이 일에 대한 공로로 이듬해에 약 3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이지만 경북 칠곡군수(漆谷郡守)로 재직하였다. 제6폭 ‘신연도(新延圖)’는 바로 이 칠곡군수에 임명되어 부임지로 향하는 행렬을 그린 것이다.

제7폭은 부친의 삼년상을 마친 뒤 55세 되는 1904년 음력 12월에 충남 정산군수(定山郡守)에 임명되어 부임하는 행렬을 그린 ‘도임도(到荏圖)’이다. 이곳에서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을 스승으로 모시고 교유하였는데, 채용신의 초기 대표작인 ‘최익현 초상’(1905년 작)은 그러한 배경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제8폭 ‘현신도(見身圖)’는 정산군수로 재직할 때 관아에서 육방 아전을 만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채용신은 정산군수에서 해임된 후 1906년 순종과 순정효황후의 가례 때 도감(都監)에 차출되어 일했다. 그 공로로 정3품에서 종2품 가선대부로 품계를 올려받았는데 제9폭 ‘봉천은도(奉天恩圖)’는 이를 기념해서 베푼 연회를 묘사한 것이다. 채용신은 스스로 종2품의 품계를 가진 것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서 이후의 작품에 관서할 때는 ‘종2품’임을 꼭 드러내곤 했다.

제10폭 ‘회갑연도’는 1910년에 맞은 회갑연 광경이다. 가족과 친지에게 둘러싸인 채용신 부부가 자손들의 술잔을 받는 모습이 그려졌다. 채용신은 1941년(92세)까지, 부인 전주이씨는 1929년(67세)까지 비교적 장수하였지만 비교적 늦게 혼인한 그는 회혼례를 치르지 못했으므로 평생도 병풍에 포함된 일생의례는 회갑이 마지막이었다.

채용신은 자신이 어진을 그렸던 사실을 1914년 ‘봉명사기(奉命寫記)’에 자세히 기록해 두었고 채용신과 지인의 글을 모아 편집한 ‘석강실기(石江實記)’에도 그의 이력이 부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석강실기’에는 권철수(權哲壽)라는 인물이 병풍 그림에 부친 명문 ‘畵屛銘’이 수록되어 있는데 1924년에 지은 것이다. 그 내용은 ≪채용신평생도≫와 대체적으로 부합하여 ‘화병명’은 이 평생도 병풍에 대해 지은 글임을 알 수 있다. 제작 시기를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채용신평생도≫는 1924년(75세) 무렵에 만들어진 병풍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다만 밀도 높은 세부 표현으로 가득한 채색의 10폭 병풍을 70대 노인이 혼자 직접 그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채석강도화소에서 초상화를 주문받아 작업했던 방식대로라면 채용신에게 자문해 그곳에서 일을 도왔던 아들과 손자가 주도해서 완성했을 가능성이 크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사실적인 그림으로 남기는 것은 자손들의 몫으로 보는 것이 맞다. 자랑할 만한 집안 어른의 한평생을 그려서 후손들이 꿈과 희망을 키워나갈 수 있는 본보기로 물려주는 것은 애초에 평생도가 가졌던 제작 취지와도 부합한다. 사실 ≪채용신평생도≫의 내용에는 과장된 표현이 많아서 정확한 사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발견되곤 하는데 이 점도 채용신 본인의 경험으로부터 시간이 많이 흐른 뒤 화가의 상상과 해석이 가미된 표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평생도에는 조선 사회에서 양반 관료들이 추구했던 꿈과 열망이 그대로 집약돼 있다. 좋은 집안에서 출생하여 가족의 축하 속에 돌을 맞고 무난히 과거급제하여 청요직으로 벼슬길에 올라 한 번쯤 지방에서 수령 생활을 한 뒤 당상관에 오르는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최고의 관직인 정승을 지낸다면 관료로서는 최고의 명예를 누리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번성한 자손을 거느리고 회갑이나 회혼례를 치를 수 있다면 더없이 축복받은 삶을 산 것으로 칭송받았다. 특정한 인물의 일대기를 시각화하는 것은 19세기 말 이후의 현상이며 그런 면에서 ≪채용신평생도≫는 평생도의 변모 과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지금 같으면 각자의 꿈과 이상을 담아 개성 넘치는 100인 100색의 평생도가 제작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청소년들에게 각자 원하는 자기만의 평생도를 구성해 한 단계씩 그 꿈을 실현해 나가라고 권하고 싶다.

미술사학자·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주관화사

어진 제작에 참여한 화가를 어진화사(御眞畵師)라 불렀는데 화가로서는 최고의 영예로 여겨졌다. 어진화사는 맡은 역할에 따라 세 등급으로 구분되었다. 주관화사는 가장 중요한 왕의 얼굴을 그렸으며, 동참화사(同參畵師)는 얼굴 이외의 몸체 부분을 담당했고, 수종화사는 이들을 도와 색을 칠하는 등 여러 업무를 보조하였다. 1900년과 1901년 어진 모사 때 채용신은 근대기 3대 화가 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 조석진(趙錫晋, 1853∼1920)과 함께 주관화사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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