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경제학 기틀 다진 ‘흰눈썹 거목’...한은 총재·서울시장 역임 [조순 1928~2022.6.23]
경제학계의 ‘거목’ 조순 전 경제부총리는 지난 6월 23일 새벽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
조 전 부총리는 한국 경제학 기틀을 다진 경제학자로 경제부총리, 한국은행 총재, 서울시장, 여당 총재를 지냈다. 경제와 정치를 아울러 유례가 드문 이력을 쌓은 인물이다. 흰 눈썹을 가진 그는 여럿 중 가장 뛰어나다는 뜻도 있는 ‘백미(白眉)’로 불리기도 했다.
1928년 강원 강릉에서 태어난 조 전 부총리는 서울대 상과대를 졸업하고 미국 보오든대에서 학사,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67년부터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학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가 쓴『경제학원론』은 74년 출간 이후 지금까지 경제학 개론서로는 가장 널리 읽힌, 한국 경제학의 초석 역할을 한 저서로 평가받는다. 그는 ‘한국의 케인스’로 불리며 ‘조순학파’라 일컬어지는 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그가 육사 교관이던 때 제자였던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 의해 88년 경제부총리 겸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발탁된다. 고도 성장기와 맞물려 부동산 투기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 그는 토지공개념을 제시했다. 특정 소수에 집중되는 부동산 개발 이익을 세금ㆍ부담금 형태로 환수해 낙후 지역 개발 등에 써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토지종합세 신설 등 토지공개념 3법을 추진했다. 이후 위헌 판정을 받으며 토지공개념법은 효력을 잃었지만 현행 부동산 세제, 개발부담금제의 토대가 됐다.
92년 그는 한은 총재로 임명된다. 한은이 ‘재무부 남대문 출장소’로 불리던 시절 그는 중앙은행 독립과 금리 자유화를 주장했다. 당시 경제 활성화를 위해 통화정책을 활용하려 했던 정부와 갈등을 빚었고, 결국 임기를 3년이나 남겨 놓고 그는 한은 총재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관가를 떠난 그는 아태평화재단 자문위원을 하면서 만난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치에 새로 발을 디뎠다. 민주당에 입당해 95년 서울시장으로 당선된다. 길고 흰 눈썹, 강직한 언행 덕분에 ‘서울 포청천’이란 별명도 얻었다. 당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주인공 ‘판관 포청천’을 빗댄 말이었다. 이후 그는 민주당 총재를 맡았고, 신한국당이 합쳐져 탄생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에서도 총재를 2번 더 지냈다.
2002년 그는 정치권을 떠나 서울대 명예교수 자리로 돌아갔다. 대통령 직속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 한반도선진화재단 고문 등 학계 원로 역할을 해왔다.
현재 양대 경제수장인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 이창용 한은 총재 모두 조 전 부총리와 인연이 있다. 추 부총리는 고인이 경제부총리로 재직하던 때 부총리 비서관이었고, 84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이 총재는 고인의 수업을 직접 들은 제자다. 이날 조 전 부총리 별세 소식에 전해지자 이들은 고인을 추모하는 입장문을 냈다.
이날 추 부총리는 “아침 한국 경제계ㆍ학계의 큰 산이었던 고인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며 “개인적으로 고인을 경제부총리 비서관으로 모실 때 보여준 온화하고 인자한 모습, 밝은 미소가 오늘 더욱 그립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한국 경제가 갈림길에 있을 때마다 기본에 충실하며 바르게 갈 수 있는 정책을 늘 고민했던 고인의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고인의 뜻을 받들어 한국 경제가 정도를 걸으며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 총재는 “경제학자로서는 물론이고 한은 총재와 경제부총리를 역임하면서 한국 경제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분”이라며 “개인적으로는 제게 가르침을 주신 스승이기도 하고, 지금 한국 경제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에서 고인의 주신 여러 지혜를 다시 새겨 보고자 한다”고 밝혔다.
정치계에서도 추모 발언이 이어졌다. 김형동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이날 “고인은 ‘케인스 같은 경제학자가 돼 수천년 가난을 해소해보겠다’는 뜻으로 경제학의 길을 걸었다”며 “고인은 학자이자 실천가”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95년 첫 번째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으로 출마해 당선됐다”며 “취임식 전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발생해 취임식을 현장에서 할 정도로 늘 시민의 삶과 함께했다”고 평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남희 씨, 장남 조기송(전 강원랜드 대표) 씨와 조준ㆍ건ㆍ승주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됐고, 발인은 25일 오전이다. 강릉 구정면 학산리에 있는 선영에 안장될 예정이다.
세종=조현숙 기자 newea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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