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칼럼] 공동체적 책임
아득한 옛날 사람들은 재앙이 오면 ‘원인’을 찾는 대신 대신 ‘범인’을 잡아 없애곤 했다. 물론 그걸로 문제가 해결될 리 없지만, 이 주술적 관행이 적어도 그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은 주었을 게다. 우리는 거기서 얼마나 진화했을까? 사회적 재난은 대개 구조적 요인에 의해 발생한다. 사고의 재발을 막으려면 사고의 복잡한 구조와 연관된 요인들 하나하나를 제거해 사고 확률을 줄여나가야 한다. 그런데 이런 접근은 우리 사회에서 별로 환영받지 못한다.
우리가 희생양 제의를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먼저 그것은 구조적 요인을 파악하는 데에 필요한 인식의 수고를 덜어준다. 그리고 범인을 처벌하는 것으로써 원인이 제거되어 곧바로 문제가 해결된다. 게다가 감정을 투사하는 데에는 역시 추상적 ‘구조’보다 구체적 인간이 적합하다. 구조에 욕을 하고, 구조에 분노할 수는 없지 않은가. 대중의 응어리진 감정을 받아내는 일에는 모름지기 ‘인간’이 적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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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예상 못한 사고 일어나
면피 관료주의와 허술한 법 체계
언론도 안전에 대한 보도 소홀
책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어
」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한 기자가 이게 다 ‘예견된 참사’였다고 썼다. 모든 예언의 문제는 꼭 사건이 발생한 다음에야 적중한다는 데에 있다. 참사를 예견하고도 아무 일 안 했다니,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을 저지른 셈이다. 사실을 말하면 이 사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사고가 나자마자 이번 참사가 당국의 잘못임을 입증하는 제보부터 받고 나선 그 방송사도 그 전날의 보도에서는 핼러윈의 들뜬 분위기를 한껏 부추긴 바 있다.
참사의 가장 큰 원인은, 우리 머릿속에 이런 사고의 가능성 자체가 애초에 들어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투입된 경찰의 숫자를 따지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그 인력은 애초에 사고예방이 아니라 범죄예방을 위해 투입된 것이었다. 그러니 이런 사태를 예상해 마련된 대응 매뉴얼이 있었을 리 없다. 설사 경찰이 신고전화 11번에 모두 출동을 한들 수습의 절차를 담은 ‘매뉴얼’이 없는 한, 그 또한 전화 받고 나갔다는 4번의 출동과 뭐가 달랐을지 모르겠다.
두 번째 구멍은 관료주의다. 용산구청장은 ‘주최자 없는 행사’를 ‘현상’이라 불렀다. 그 사고는 구청의 ‘책임’이 아니라는 얘기다. 경찰에서는 자신들에게 시민들의 이동권에 간섭할 법적 ‘권한’이 없다고 하는 모양이다. 핼러윈은 이렇게 당국의 ‘책임’과 ‘권한’ 밖에 놓인 이상한 ‘현상’이 되었다. 일본의 경우에는 주최자가 없는 핼러윈 축제의 안전을 경찰과 지자체가 함께 책임진단다. 군중의 동선을 지휘하는 시부야의 DJ 폴리스는 이미 축제의 명물이 되었다.
세 번째 구멍은 입법의 문제다. 일본에서 DJ 폴리스가 시민의 이동권에 간섭할 권한을 가진 것은 진즉에 경비입법을 개정해 새로 ‘혼잡경비’ 항목을 포함시켰기 때문이란다. 우리의 국회의원들은 그동안 뭘 하고 계셨는지 모르겠다. 일본의 경우 지자체에서 이번 행사가 열리는 시부야의 모든 거리를 돌아다니며 위험한 장소를 미리 체크해 두었다고 한다. 서울시와 용산구에도 시의원과 구의원들이 있을텐데, 비싼 세비 들여 외유나 하면서 왜 이런 것은 안 배워왔을까?
네 번째 구멍은 언론이다. 우리의 언론들이 예언의 은사를 시연하는 동안, 일본의 언론들은 핼러윈 행사 전날 시민들이 안전을 위해 알아야 할 사항을 상세히 보도했단다. 이런 보도를 접했느냐 여부가 혼잡상황에선 큰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 사고 후에 우리 언론이 범인 찾기에 몰두하는 동안 원인을 분석해 상세히 보도한 것은 일본의 언론이었고. 그런 혼잡상황에서 생명을 지켜줄 안전수칙을 전해준 것은 미국의 언론이었다. 우리에겐 전문가도 없나? 그런 기사를 우리는 인용 보도로 접한다.
마지막 구멍은 왜곡된 시민의식. 이 와중에도 ‘문재인 정권이었다면 사고가 없었을 것’이라 믿는 집단과, 대통령·주무장관·지자체장이 져야 할 지휘 책임마저 부정하는 집단이 서로 쌈질을 한다. 156명의 희생은 그들에게 이렇게 정치적 공방의 소재일 뿐이다.
나랏돈으로 12년 동안 의무교육을 시켜줘도 우리는 ‘인과적’ 사고보다 ‘응보적’ 사고에 익숙하다. 원인을 찾는 논리적 담론보다 책임을 물을 범인을 잡는 놀이를 좋아한다. 예를 들어 ‘토끼 머리띠를 한 남자를 찾아라.’ 그 놀이 끝에 결국 말단 경찰관들이 범인으로 지목된 모양이다. 드디어 범인을 찾은 언론은 신이 났다. 대통령까지 이들을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처리하라”고 지시하고 나섰다. 이들이 공동체 전체의 죄를 대속할 희생양이 될 모양이다.
내 눈엔 이게 부조리해 보인다. 또 세월호의 전철을 밟으려나? 존재하지도 않는 범인을 잡으려 특조위를 수차례나 띄웠지만, 성과가 있었던가. 그 큰 희생을 치르고, 그 난리를 치고 어디 해상안전이 조금이라도 나아졌던가. ‘얘들아 미안하다.’ 이 문구가 또 등장했다. 정작 물어야 할 것은 ‘공동체적 책임’이다. 이 사고의 책임에서 자유로운 이는 아무도 없다. 모두가 공범이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우리는 계속 미안할 것이다. 영원히 미안만 할 것이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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