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 속에서 다시 살아난 '초이'의 목소리

2022. 3. 16.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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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길 수야 있지만 그런 승리는 원하지 않아. 누구의 가슴도 짓밟고 싶지 않아.”

빅토르 초이가 1986년 러시아 모스크바 지하철 칸테미롭스카야역 입구로 들어가고 있다. / 모스크바멀티미디어미술관 소장


빅토르 초이(1962~1990)가 속한 록밴드 키노는 1988년 8번째 앨범 〈혈액형(그루파 크로비)〉을 발표했다. 소련판 베트남전이라 불리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서서히 끝을 향해가던 때였다. 연인원 62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투입한 소련군에서는 1만5000여명의 전사자가 나왔고, 초이가 앨범을 발표한 해부터 철군을 시작했다. 이듬해인 1989년에는 소련군 병력이 완전 철수하며 10년 가까이 지속된 전쟁은 마침내 막을 내렸다. 초이는 직접 쓰고 부른 앨범과 동명의 타이틀곡 ‘혈액형’에서 전쟁터에서 그 누구도 죽이지 않고 그저 귀향하고 싶을 뿐인 병사의 목소리를 담았다.

러시아를 비롯한 전 세계의 팬들이 그를 기리며 쓰는 상징적인 표현대로 ‘초이는 살아 있다’. 올해로 탄생 60주년을 맞아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빅토르 최. 영웅의 길〉이라는 대규모 전시회가 열릴 정도다. 모스크바 마네즈 중앙전시관 11개 홀을 사용할 정도로 성대하게 치러지는 이 기념행사는 2년이 넘는 준비 기간을 거쳐 그가 남긴 음악과 영상, 유품 등 300건 이상의 전시물을 선보인다. 1962년 태어나 28세를 일기로 1990년 교통사고로 요절한 초이의 생애보다 더 긴 기간 동안 추모가 이어질 정도로 여전히 그는 살아 있는 듯 보인다.

초이의 예술 요약하면 ‘반전주의’

그의 목소리는 특히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현시점에서 더욱 생생하게 살아난다. 공교롭게도 그가 살아 있던 당시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 세력과 벌인 긴 전쟁으로 체제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현재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특별군사작전’이란 명목으로 광대한 영토 곳곳의 병력을 집중 투입하며 전쟁을 벌이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처럼 우크라이나 침공을 반대하는 러시아 내의 반전 목소리가 적지 않다. 당장 우크라이나군에 포로로 잡힌 20대 초반의 러시아군 병사들마저 “훈련이라고 듣고 왔는데 참전을 지시받았다”며 항변하는 실정이다.

“초이의 예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반전주의’라고 할 수 있죠. 초기와 후기의 성향에 다소 변화가 있지만 문학적·음악적으로 높은 수준을 지향했다는 점과 더불어 줄곧 변하지 않고 유지된 특징입니다.” 이대우 경북대 교수(노어노문학)는 초이와 그의 밴드 키노의 대표곡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즈베즈다 포 이메니 솔른체)’에서 따와 동명의 제목으로 초이의 전기를 썼다. 이 노래에도 ‘혈액형’과 비슷하게 전쟁에 반대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리고 2000년 동안 전쟁이 있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전쟁. 전쟁은 젊은이들의 일이다.” 이 교수는 초이가 1960년대의 소련 음유시인과 세계 각국에서 번진 ‘68혁명’의 영향으로 뚜렷한 저항적 예술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했다.

초이의 전성기는 소련 체제가 개혁과 개방을 내걸고 변화를 맞던 중대한 분기점과 맞물려 있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정치체제의 변화를 상징했다면 초이는 그야말로 문화의 대변혁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초이의 노래가 자신이 소련의 개혁을 추진하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변화를 원한다. 변화를! 우리의 심장이. 변화를! 우리의 눈동자가.” ‘변화를 원한다(호추 페레멘)’는 초이의 노래는 그래서 그의 팬들이 직접 정치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현장에서 널리 불려졌다. 2011년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 지지세력과 반대세력이 거리에 나와 각자의 정치적 구호를 외치며 맞붙었을 때도 초이의 노래는 양 진영 모두에서 흘러나왔다.

모스크바서 〈빅토르 최. 영웅의 길〉 전시회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음악과 메시지는 시시때때로 살아난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지원하는 벨라루스에선 2020년 8월 루카셴카 대통령이 여섯 번째 연임을 확정하며 당시 26년간 이어진 독재를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시민 시위대는 ‘변화를 원한다’고 외치며 이 노래를 귀가한 이후에도 불렀다.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의 아파트단지마다 오후 9시면 어김없이 ‘페레멘(변화)’이라고 외치는 노랫소리가 동네 안에 울려퍼졌다.

초이가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시기는 그가 23세인 1985년부터였다. 그후 음악과 영화를 넘나들며 왕성한 활동을 보였지만 햇수로는 5년에 불과했다. 짧은 전성기에도 그보다 훨씬 오랜 기간 그를 불러내는 움직임이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러시아의 포털사이트 얀덱스가 집계한 내역을 보면 얀덱스 음악 서비스에서 초이의 노래가 재생된 시간은 이미 도합 1000년을 훌쩍 넘겼을 정도로 지금도 여전히 인기가 있다.

그 비결로 당시나 지금이나 색깔을 잃지 않는 청년기 특유의 저항정신을 꼽는다. 빅토르 초이는 청소년기부터 서방의 록 음악에 심취해 성장했다. 현지의 언더그라운드 음악계에서 활동하던 1980년대 초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보일러실에서 화부(기관이나 난로 따위에 불을 때거나 조절하는 일을 맡은 사람) 일을 병행하기도 했다. 그는 이후 자신의 생을 담은 다큐 영화에서 석탄을 퍼담던 시절을 회고하며 “나는 내가 자유롭다고 느낀다. 나는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했다. 그가 ‘캄차카’라는 별명을 붙인 이 보일러실은 초이를 기념하는 박물관 겸 클럽이 됐다. 모스크바 중심가의 아르바트 거리 한편에 서 있는 ‘초이의 벽’과 함께 그를 기리는 팬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대표적 공간이다.

그는 한동안 국내에는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함북 성진 출신인 그의 증조부 최용남씨(1883~1947)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한 뒤 1937년 스탈린에 의한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후 빅토르 초이의 부모가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면서 그 역시 소비에트 사회의 일원이면서도 서방의 문화에 익숙해져 개혁과 개방을 희망하는 청년으로 자랐다.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는 “심지어 한국에 빅토르 초이가 알려진 것은 1990년대 들어 한·소 수교 등 공식적인 차원의 교류를 시작한 이후였고, 이때는 이미 그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면서 “물론 그가 고려인의 후손이라는 점도 국내에서 뒤늦게 주목받는 이유가 되긴 했으나 그가 록 음악의 저항정신을 잘 보여줬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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