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욱 칼럼] 홍보 전략을 홍보하는 선거

고승욱 2022. 1. 12.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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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리한 판세 뒤집은 선거에는
탁월한 전략가가 받치고 있어

홍보는 후보 비전을 유권자에
언어로 각인하는 일련의 과정

내용 없이 스킬에만 집착하면
표는커녕 공감도 얻을 수 없다

미국 대선에서 불리한 판세를 뒤집고 승리한 후보 뒤에는 특별한 홍보 전략가가 한 명씩 있었다. 1992년 걸프전 여세로 기세등등하던 현직 대통령 조지 H W 부시를 꺾은 빌 클린턴에게는 제임스 카빌이 있었다. 카빌은 승리를 만끽하던 유권자에게 “이겨서 좋은데, 주머니 사정은 괜찮나”라고 물었고, 이를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말로 압축했다. 2000년 주지사 직함 빼고는 내세울 게 없었던 조지 W 부시는 인간적 매력과 경제 호황, 집권당 프리미엄을 두루 갖춘 앨 고어를 제치고 백악관의 주인이 됐다. 그에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칼 로브가 있었다. 네거티브 캠페인으로 진영을 나누고 집토끼를 자극해 투표소로 끌어내는 로브의 전략은 지금도 가장 확실한 운동 방법이다. 이뿐이 아니다. 버락 오바마에게는 온라인 시대에 최적화된 선거 조직을 만든 데이비드 플러프가, 이미지 정치의 원조 로널드 레이건에게는 백악관마저 TV 스튜디오로 활용한 마이클 디버가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유권자 마음을 읽는 능력이 탁월했다는 점이다. 디버의 시대는 사진과 영상이 텍스트를 추월하던 1980년대였다. 영화배우 출신 레이건은 TV 카메라 앞에서 디버가 주문하는 연기를 능숙하게 해냈다. 카빌의 1990년대는 광고 카피의 시대였다. 핵심을 찌르는 한 문장, 사운드 바이트가 승패를 갈랐다. 2000년대 미국 사회에 표면화된 중산층 양극화는 네거티브 전략의 대가인 로브를 키운 자양분이었다. 소규모 자발적 모임을 인터넷으로 조직한 오바마 캠프의 플러프가 온라인 시대 최고 전략가로 등극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솜씨 좋은 홍보가 무조건 선거 승리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카빌은 클린턴 취임 후 국제 무대로 진출했다. 브라질 에콰도르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유력 후보자를 돕고, 영국 캐나다 이스라엘 총선에 관여했다. 그런데 성공률은 높지 않았다. 갈등을 빚다 중간에 그만둔 경우도 많았다. 로브도 백악관을 떠난 뒤 정치컨설팅 회사를 차려 큰돈을 벌었지만 뚜렷한 성과는 보여주지 못했다. 전설적인 킹메이커였던 이들의 능력은 낯선 곳에서 잘 모르는 사람을 홍보할 때는 빛이 바랬다. 시대 변화를 반영한 홍보 스킬을 똑같이 적용할 수는 있어도 정작 무엇을 홍보할 것인지는 전혀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성공한 홍보 전략가의 또 다른 공통점은 후보와 오랜 시간 인연을 맺었다는 점이다. 디버는 레이건과 30년 넘게 일했다. 레이건의 아들이라고 불렸다. 그는 닉슨 이후 몰락한 공화당을 재건해 보수의 가치를 다시 세운 레이건의 이념적 동지였다. 거기에 이미지 메이킹이라는 홍보 스킬을 얹었다. 로브는 1974년 부시 가문과 인연을 맺었다. 1994년 부시의 주지사 선거에 뛰어들어 선거 캠프라는 교향악단에서 지휘자로 자리매김했다. 부시는 유능한 연주자에 불과했다. 신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시는 언론이 로브와 공동 대통령이라고 조롱해도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신념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사람이 로브였기 때문이다. 카빌의 사운드 바이트는 운동원에게 내린 지침에서 출발했다. 늘 변화와 경제를 말하고 건강 조심하라는 취지의 문구를 벽에 걸었는데 이것이 나중에 슬로건이 됐다. 홍보 전략가에게 선거운동이란 후보의 비전을 공유하고, 설정된 목표를 언어로 구현하며, 유권자에게 각인시키는 일련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남의 나라 선거 이야기를 장황하게 꺼낸 건 대선을 앞둔 우리나라에 선거를 승리로 이끌 ‘탁월한’ 홍보 전략가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주군을 만나 책략을 설파하고 책사로 등극해 천하를 도모한다는 춘추전국시대 이야기가 먹힐 정도다. 후보 단일화가 화제가 됐으니 조만간 합종연횡의 비책이 있다는 누군가가 등장할 것이다. 지금 선거판에는 홍보 스킬만 넘친다. 유권자를 나이와 성별, 지역과 계층으로 잘게 쪼개서 접근하니 여기서 하는 말과 저기서 하는 말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고는 유튜브와 SNS 전략, 2030과 7080 공략법이 어떻다고 뻐긴다. 어느 후보는 대통령을 뽑지 말고 심으라고 하고, 어느 후보는 비단주머니에 담긴 비책을 찾아 몸을 던진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라며 홍보 전략을 홍보하는데, 좀처럼 내용을 찾을 수 없다. 당연히 무슨 말에도 공감할 수 없다. 실망을 넘어 포기한 선거, 이제 후보들에게 궁금한 게 딱 하나 남았다. 진짜 홍보하고 싶은 게 있기는 할까.

고승욱 논설위원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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