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스스로 간 작가 유미리 "그들의 슬픔이 스며들었다"
6년 전 후쿠시마로 이주, 서점 열어
"주민들 고통의 근저 나와 같아"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時は過ぎない)”’
소설책 ‘우에노역 공원 출구(원제목:JR上野駅公園口)’에 서명을 부탁했더니 작가 유미리(53)는 이런 문구를 써주었다. 그가 동일본 대지진 10년을 맞는 소감이라고 했다.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당시의 고통과 슬픔이 옅어지거나 가벼워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재일한국인인 유 작가는 2015년부터 후쿠시마현 미나미소마(南相馬)시에 살고 있다.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겨우 16km 떨어진 곳이다. 방사능 피해를 우려해 모두가 후쿠시마를 떠날 때 그는 제 발로 이곳으로 들어왔다.
그는 지난 2월 25일 일본 외국특파원협회(FCCJ)가 주최한 회견에서 “전쟁과 원전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6.25 전쟁을 피해 내쫓기듯 삶의 터전을 떠나온 나와 후쿠시마 주민들이 느끼는 고통의 근저는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의 부모는 6.25전쟁을 피해 작은 어선을 타고 일본으로 밀입국했다. 파친코업에 종사했던 아버지와 카바레 호스티스였던 어머니는 어린 시절 이혼을 했고, 학교에서는 늘 따돌림의 대상이었다. 중학교 졸업의 학력에 재일 한국인, 여성이라는 ‘마이너 중의 마이너’로 대접받던 그는, 스스로의 아이덴티티를 “한국인도 아닌, 일본인도 아닌 존재”라고 규정한다.
후쿠시마로 들어오기로 결심하게 된 건 대지진 이듬해인 2012년, 임시재해방송국에 출연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일주일에 한 번 30분씩 600명 넘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내린 결정이었다.
“1년 정도 출연하겠지 생각했는데, 끝까지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려다 보니 임시방송국이 문을 닫은 2018년까지 7년이나 계속하게 됐어요. 고통과 슬픔의 이야기를 듣는데, 나는 안전한 수도권에 사는 게 마음이 아팠죠. 어느새 그들의 감정이 내 몸 안으로 스며들어서, 내가 슬픔을 받아들이는 그릇이 되는 체험을 했습니다.”
이때의 경험은 소설가 유미리의 작품 세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동안 ‘가족 시네마’(1997년 아쿠타가와상 수상) 등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소설을 써왔다면, 지금은 보다 광범위한 사회 문제를 들여다보게 됐다. 지난해 말 미국 최고 권위상인 전미(全美)도서상을 수상한 ‘우에노역 공원역 출구’도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타격을 입은 도호쿠(東北) 지역 출신이 주인공이다. 도쿄올림픽 건설현장으로 돈을 벌러 상경했지만, 불행이 겹쳐 결국 홈리스가 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유 작가는 도쿄올림픽이 도호쿠 지방 부흥의 상징처럼 다뤄지는 데 대해 반감을 드러냈다. 그는 "부흥 올림픽은 간판 뿐이며, 실제는 부흥에 기여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부흥에 장해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도쿄올림픽 건설 붐으로 정작 도호쿠 지역은 일손과 자잿값 급등으로 애를 먹고 있다고 했다.
“결국 방사능 오염제거 작업에 투입되는 건 최저임금이 싼 오키나와 지역에서 데려온 노숙인들입니다. 당뇨병, 알코올 중독, 간 경변 등을 앓다가 죽어도 실제 이름이 달라서 본인 확인도 안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유족을 찾지 못해서, 마을의 절에서 유골을 맡아두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다음 작품은 이들 작업원에 관한 이야기다. JR야마노테(山手)선 역 이름을 제목으로 한 연작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이다. ‘우에노역 공원 출구’의 주인공인 노숙자와 작업원은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다.
“거리에서 노숙자를 만나면 쳐다보지 않듯이, 작업원들과는 되도록 얼굴을 마주치지 않아요. 작업원이라는 라벨을 붙이고 있기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 거죠. 그들 한 명 한 명의 라벨을 떼는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이름도 없이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름을 되돌려주는 게 소설가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팬데믹은 후쿠시마 지역 주민들의 연약한 틈을 가차 없이 파고들었다. 유 작가는 “긴급사태 선언이 내려진 뒤 자살이나 고독사, 아사가 잇따르고 있다. 관계가 가늘면 죽는 사람이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3년 전 집 바로 옆에 문을 연 서점 ‘풀 하우스’와 소극장은 팬데믹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주민들이 “미리상(미리씨)~”이라고 스스럼없이 문을 젖히고 들어올 정도로, 동네의 사랑방이 됐다.
“한 여중생이 아우슈비츠에 관한 철학서를 읽는 걸 봤습니다. 지진과 쓰나미, 원전사고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은 스스로 죄의식이 있어요. 그만큼 삶과 죽음을 계속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저는 여기서 예술과 문화가 피어날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거기에 기대를 걸어보고 싶습니다.”
도쿄=윤설영 특파원 snow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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