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지연 땐 책임자라던 정은경..백신 계약 발표 땐 안보였다
전 세계 40여개국이 올해가 지나기 전에 코로나 백신 접종을 시작한 가운데, 우리 정부도 백신 도입에 뒤늦게 속도를 내고 있다. 정부는 최근 화이자, 얀센, 모더나와 백신 도입 계약을 체결했거나 도입에 합의했다는 소식을 잇따라 발표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백신 도입의 ‘최고 결정권자'라는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소외됐다. 백신 도입이 지연될 때는 정 청장을 앞세우더니, 생색은 대통령과 총리 등 ‘윗사람'들이 독차지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청와대 강민석 대변인은 29일 브리핑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모더나사(社)의 CEO 스테판 반 사엘과 통화해서 우리나라에 2000만명 분량인 4000만 도즈 백신을 공급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강 대변인은 “이는 우리나라와 모더나 계약 협상을 추진하던 2000만 도즈보다 두배 늘어난 것”이라고 했다. 강 대변인은 모더나 백신의 도입 시기는 내년 2분기부터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구매물량 확대로 가격이 인하될 것”이라며 “문 대통령은 모더나 CEO에게 ‘모더나 백신이 거두고 있는 성공과 긴급 사용승인을 받은 것에 대해 축하하고 코로나 극복 희망이 되는 것에 대한민국을 대표해 감사하다’고 밝혔다”고 말했다. 이례적으로 문 대통령의 통화 사실까지 공개하면서 백신 도입 과정에서 문 대통령의 ‘공’을 강조한 것이다.
이에 앞서 화이자 백신 계약 체결 때도 비슷한 장면이 연출됐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지난 24일 “정부는 23일 글로벌 제약사인 얀센, 그리고 화이자와 코로나19 백신 구매계약을 체결했다”며 “얀센의 경우, 당초 예정된 물량보다 200만명분이 더 많은 총 600만명분을 계약했다”고 발표했다.
총리실에 따르면, 화이자 백신은 1000만명분을 계약하고 일단 내년 3분기부터 국내에 들어올 예정이다. 정부는 화이자 백신의 도입시기를 2분기 이내로 더 앞당기기 위해 국가 차원의 역량을 총동원하고 있으며 구체적인 협상도 별도로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모더나로부터 확보한 1000만명분에 대해선 1월 중으로 계약을 마칠 계획이며, 이미 계약을 끝낸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1000만명분은 내년 2월 도입을 목표로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문 대통령과 정 총리는 당초 정부의 백신 도입 지연을 비판하는 국민 여론이 커졌을 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정 청장을 ‘백신 최종 결정권자’로 내세웠다.
손영래 중앙사고수습본부 전략기획반장(보건복지부 대변인)은 지난 23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정례브리핑에서 “현행 감염병 예방법상 백신의 구매 결정과 그 계약 절차에 대한 조치는 질병관리청장이 한다”며 “따라서 질병관리청에서 백신 구매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손 반장은 “다만 개발 기간이 단축돼 있는 백신을 조기에 도입해야 하고, 전국적으로 대규모 인원에 대한 광범위한 접종이 개시돼야 한다는 점 때문에 백신의 구매, 확보, 개발 등에 대해서 범부처적인 지원체계를 함께 꾸려나가고 있다”고 했다. 질병관리청이 컨트롤타워를 맡고, 범정부차원에선 이를 지원한다고 했었다.
당시에도 코로나 초기부터 방역의 실질적 컨트롤 타워를 자임해왔던 청와대와 정부가 백신 도입 지연과 관련해 문재인 대통령 책임론이 대두되자 질병관리청의 권한을 부각하고 나선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이 같은 비판에 청와대는 문 대통령이 지난 4월부터 ‘백신의 충분한 확보’를 지시했다고 해명했으나, 백신 확보가 늦어진 구체적 사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청와대 설명대로라면 문 대통령이 백신 물량 확보를 지시했지만, ‘방역 컨트롤타워’인 질병관리청과 정은경 청장이 이 지시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문 대통령은 올 1월 코로나 초기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센터와 국무총리실 등에 “컨트롤타워에서 전체적인 상황을 다 파악해서 국내외 상황까지 총체적으로 지휘를 적기에 제대로 해달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2017년 취임 초기부터 “중대 재난·재해의 컨트롤타워는 청와대라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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