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에서 '인간수업'까지.. 홍기천 감독의 특수분장 30년사

강동호 2020. 12. 6.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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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때 실리콘 더미 개발
"'M' 땐 어려운 특수분장 많아"
"압박감 커..실패 용납 안 됐죠"
"'다모', 퓨전 사극 첫 시도 성공"
심장 뛰는 특수분장 기술도 개발
대본 중시..PD·시청자 입장 생각
'취화선'으로 칸 레드 카펫 밟아
"특수분장은 예술 세계..창조적 맛"
"특수분장·CG 결합하면 완성도 높아"
"일주일 안 하면 저도 손 굳죠"
"왕따 가장 힘들어..잠 못 자고 기관지도 상해"
"특수분장도 입찰로 해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핼러윈 문화·노역 분장에 관심..'영화감독' 꿈
홍기천 감독이 1987년 MBC 입사 뒤 처음 한 특수분장. ‘모여라 꿈동산’ 외계인 분장이다. 홍기천 제공
홍기천 특수분장감독은 한국 특수분장 역사의 산증인이다. 1987년 MBC에 입사해 특수분장과 인연을 맺은 뒤 30년 넘은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홍 감독은 공로를 인정받아 올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그가 말하는 특수분장 30년사를 5차례에 걸쳐 전한다.
 
1980년대엔 특수분장이란 말 자체가 없었다. 특수분장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홍기천(62) 특수분장감독은 영화 ‘혹성탈출’(1968)과 ‘프레데터’(1987)를 보며 독학으로 특수분장을 시작했다. 영화감독을 꿈꿨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그가 1987년 MBC에 분장사로 입사한 건 두 장의 사진 덕분이었다. 그 전엔 아크릴 가공업체에서 일했다.

“(한국 나이로) 서른 살에 늦깎이로 운 좋게 입사했어요. 영화를 좋아해 스태프를 해 보자 싶었죠. 배우 최진실 매니저였던 배병수와 어릴 때부터 친구였습니다. 같이 영화를 보러 다녔죠. ‘혹성탈출’을 많이 봤거든요. 하도 신기해 조각 연습도 하고 가면을 만들어 쓰고 사진 두 장을 제출했습니다.”

하나는 ‘혹성탈출’ 원숭이, 다른 하나는 좀비를 연상케 하는 분장을 한 모습이었다. 그는 원숭이 가면에 대해 “점토로 조각하고 석고로 떠 만들었다”며 “아크릴 물감으로 칠하고 머리엔 빗자루와 누나가 잘라 버린 머리카락을 붙였다”고 설명했다.
홍기천 감독이 1987년 MBC 입사 당시 제출한 두 장의 사진. 그 자신을 모델로 한 특수분장 모습이다. 홍기천 제공
MBC 입사 뒤 처음 한 특수분장은 어린이 프로그램 ‘모여라 꿈동산’의 외계인 분장이었다.

“선배들이 할 줄 모르니 날 시키는 거예요. 결혼한 지 몇 달 안 된 때였는데 회사에서 먹고 자며 밤새 연구했어요. 라텍스로 만들어 성공했죠.”

전성기는 얼마 안 돼 찾아왔다. 드라마 ‘동의보감’(1991)에서 실리콘 더미(인체 모형)를 최초로 개발해 사용한 것. 실리콘 더미는 업계에서 갓난아기, 시체 등 장면에 널리 쓰인다. 그는 “‘동의보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홍기천 감독이 1991년 드라마 ‘동의보감’의 실리콘 더미에 칠하고 있는 모습. 홍기천 제공
“특수분장을 제대로 한 게 ‘동의보감’이었거든요. 참수 장면이 있어 두상이 필요했어요. 어떻게 하란 건가, 대본을 보고 놀랐죠. 연구하느라 세월을 많이 보냈는데 가장 먼저 창틀 실리콘이 떠올랐어요. 창틀 실리콘이 반투명한 걸 알았거든. 화장품을 녹이니 색이 나오더라고요. 그걸로 실리콘 더미를 최초로 만들었죠.”

쥐와 관련한 일화도 잊을 수 없다.

“흰쥐 30마리가 온 거예요. 쥐가 시체를 파 먹는 장면이 있었거든요. 근데 흰쥐는 안 된다는 거야. 쥐를 잡아 일일이 꺼멓게 칠하고 드라이어로 말렸죠. 역겹더라고요. 쥐에게도 몇 번 물리고, 그땐 너무 잔인했어요.”
1994년 드라마 ‘납량특집 M’에서 특수분장을 한 심은하. 홍기천 제공
그는 ‘동의보감’과 함께 1990년대 대표작으로 ‘납량특집 M’(1994)을 꼽는다.

“‘M’ 때 굉장히 어려운 특수분장이 많았어요. 의도한 대로, 실패 없이 됐어요. (드라마) 국장 하고 많이 싸웠죠. 너무 무섭다고요. 심은하 배에서 아기가 발광하는 게 있는데 결국 삭제됐어요. 그 아기도 직접 만들어 심은하 배에 붙인 거고요.”

그는 “못 만드는 게 없는 것 같다”는 말에 “그땐 ‘이걸 안 하면 큰일 난다’, ‘프로그램 망쳐 버리면 인생 끝이다’는 압박감이 컸다. 결과만 따지고 실패가 용납되지 않았다”고 돌아봤다.
지난 20일 서울 용산구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난 홍기천 특수분장감독. 서상배 선임기자
◆“돼지 심장 52개 쓴 ‘뉴하트’…한동안 돼지 구이 못 먹어”

홍기천(62) 특수분장감독은 드라마 ‘동의보감’(1991), ‘납량특집 M’(1994)과 함께 ‘다모’(2003), ‘뉴하트’(2007∼2008)를 대표작으로 꼽는다. 홍 감독은 “‘다모’는 처음 시도한 퓨전 사극이었다”며 “후배 한 명과 분장, 특수분장을 다 해서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다모’에서 활로 독침을 쏘는 게 있는데 제가 직접 만들어 쏘고 그랬어요. 진짜 화살을 맞으면 푹 들어가니까 그런 느낌으로 해야겠다 해서 더미(인체 모형)를 만들었죠.”
홍기천 감독은 ‘다모’에서 더미를 이용해 극 중 인물이 화살에 맞는 장면을 보다 사실감 있게 표현했다. 홍기천 제공
홍 감독은 “의학 드라마만 6편 했는데 ‘뉴하트’가 가장 힘들었다. 수술 장면이 가장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뉴하트’에선 심장이 뛰는 특수분장 기술을 개발했다.

“맨 처음엔 ‘뉴하트’를 우습게 생각했어. 의학 드라마를 많이 해 봤으니까. 대본 보니 그게 아니야. 심장을 움직여야 하는데 손으로 하니 아파서 몇 시간 동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박홍균 PD에게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 했죠. 그래서 공기로 할 생각을 했는데 풍선으로 하니 안 되더라고요. 그러다 우연치 않게 골무로 공기를 줬다 안 줬다 하니 되는 거예요.”

‘뉴하트’에 나온 심장은 인공심장이 아닌 돼지 심장이다. 드라마 촬영 당시 돼지 심장을 무려 52개나 썼다.
2003년 드라마 ‘다모’ 주연을 맡은 배우 김민준과 홍기천 감독(오른쪽). 홍기천 제공
“도살장에서 돼지 심장을 갖고 와 실리콘으로 연결하는데 너무 힘든 거예요. 한 6개월 동안 돼지고기 구이를 안 먹은 것 같아요. 지금은 인공심장을 많이 만들지만 그땐 쪽대본 때문에 만들 시간이 없었어요. 지금 같으면 6명이 할 일을 혼자 다 했죠. 의사가 항상 내 옆에 있었지. 나 쓰러져 죽을까봐. 자문도 해 주고.”

대본을 중요시하는 것, 그만의 작업 원칙이다.

“대본을 보고 어떤 특수분장을 원할까, 감독 입장에서 생각해요. 그 다음 어떻게 분장해야 시청자들에게 감동이 전달될까, 시청자가 보면서 어떤 느낌을 받을까를 생각하고요. ‘뉴하트’ 땐 박 PD에게 감동을 주려면 어떻게 분장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제가 현장에서 지휘를 했죠. 그 양반과 (2017∼2018년 tvN) ‘화유기’를 또 했지.”
2012년 드라마 ‘무신’에서 말 특수 소품을 제작한 홍기천 감독. 홍기천 제공
◆“프랑스 영화 ‘고요한 아침’ 특수분장 참여”

홍기천(62) 특수분장감독은 국내 방송 특수분장의 대부다. 홍 감독 손을 거친 드라마는 150편 정도, 예능도 100편이 넘는다. 방송만 한 건 아니다. 2002년 영화 ‘취화선’ 분장을 맡아 칸국제영화제 레드 카펫을 밟았다. 뮤지컬 5편의 분장도 했다.

2016년 MBC에서 정년 퇴임한 뒤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tvN ‘화유기’, 넷플릭스 ‘인간수업’ 등을 했고 가장 최근엔 프랑스 영화 ‘고요한 아침’의 특수분장을 맡았다. 우크라이나 출신 프랑스 배우 올가 쿠릴렌코가 주연을 맡고 ‘페이지 터너’(2006) 드니 데르쿠르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작품이다. 올가을 한국에서 촬영했다. 유연석이 형사로 나온다.

그는 “외국 감독에게 인정받아 기쁘다”며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에 감동을 느끼더라”고 덧붙였다.

◆“후배들 노력 안 해…하루 3시간 이상 연습해야”

특수분장은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다. 홍기천(62) 특수분장감독의 좌우명이 ‘손과 머리로 무에서 유’인 이유다. 홍 감독은 “창조적인 맛이 특수분장의 매력”이라고 말한다.

“분장은 크게 뷰티, 분장, 특수분장으로 나뉘어요. 특수분장은 특수한 행위로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노역 분장이나 상처 분장, 사극의 수염은 색칠만 해서는 효과가 나지 않잖아요. 특수분장을 컴퓨터 그래픽(CG)이나 시각특수효과(VFX)로 대체하면 안 되냐 하지만 너무 비싸서 안 돼. CG가 보통 1초에 2000만원이거든요. 노역 분장이라든가 긴 장면은 아날로그 특수분장이 효과가 나요. 올해 미국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에서 분장상을 받은 ‘밤쉘’ 카즈 히로도 다 직접 분장한 거예요. CG의 장점은 배경이죠. 특수분장과 CG는 결합됐을 때 완성도가 가장 높아요.”

그는 “지식이 많아도 자기 안에만 가둬 두면 소용없다. 자료가 많다 보니 후배들이 노력을 안 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면서 꾸준한 연습을 강조했다.

“우리 때보다 지금 애들이 더 늦어요. 그 당시엔 책도 없고 배울 데가 없었어요. 오로지 집념으로 독학해야 했죠. 회사에 들어가도 가르쳐 주지 않아요. 어깨너머로 보는 거지. 재료도 알아서 찾아야 했어요. 지금은 자료가 너무 많으니까 언제든 자료 보면 되는 줄 알고 연습을 안 해요. 뭐든지 손에 익어야 하잖아요. 특수분장도 잘하려면 하루에 3시간 이상은 해 봐야 하거든요. 재료비 부담은 있지만 (과거와 달리) 어떤 재료를 어떻게 써야 한다는 게 있어서 재료 손실이 없죠.

꿈만 갖지 말고 당장 시작해라. 내가 안 하면 남이 한다.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라. 특수분장은 기술로만 되는 게 아니다. 예술 세계니 다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거다. 후배들에게 해 주고 싶은 얘기입니다. 누구든 노력만 하면 오히려 더 쉽게 승산이 있을 거라 봅니다.”
지난 20일 서울 용산구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난 홍기천 특수분장감독. 서상배 선임기자
그 역시 “일주일간 손을 놓으면 손이 굳는다”며 늘 조각을 연습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그에게 장관 표창을 수여한 이유 중 하나로 “후배 양성에도 적극 참여해 한국 분장 분야의 귀감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가 키운 후배 중 가장 잘된 사람은 메이크업 아티스트이자 뷰티 크리에이터 이사배다.

◆“한두 회사가 드라마·영화 잠식…입찰 제도 도입해야”

홍기천(62) 특수분장감독은 “특수분장은 꿈을 실현시켰지만 너무 힘들었다”고 말한다. 홍 감독은 “이제야 말할 수 있지만 왕따와 시기, 질투가 가장 힘들었다”며 “신문에 한 번 났다고 해서 거의 1년간 왕따를 당했다”고 설명했다. 32년여간 특수분장 일을 하면서 잠을 잘 못 자고 기관지도 많이 상했다.
홍기천 특수분장감독. 서상배 선임기자
“(처음엔 특수분장이) 미숙해도 사람들이 보면 놀랐는데 눈높이가 올라가니 여기서 멈추면 안 되는 거예요. 더 나은 걸 해야 하니 잠을 못 잤죠. 또 그땐 약품에 독성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썼어요. 그동안 독성 물질을 종이컵 한 컵은 먹지 않았을까. 그 당시에 마스크가 어딨어요. 그래서 폐가 안 좋아요. 운동을 많이 하죠.”

의도한 대로 관객이나 시청자들에게 전달됐을 때 가장 뿌듯하다. 그는 “특수분장은 그 장면에 맞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업계 현실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이 특수분장에 도전하는데 의외로 수요가 별로 없어요. 입찰 제도가 없어 다 인맥으로 하거든요. 인맥 없는 사람은 끝이에요. 한두 회사가 영화에 드라마까지 잠식하고 있어요. 그런 점이 가장 잘못된 것 같아요. 입찰로 해서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기회를 줬으면 좋겠어요. 미국 같은 경우는 조각 잘하는 사람에게 조각을 맡기고, 실리콘 잘하는 사람에게 실리콘을 맡기는 식으로 분산을 해 줘요. 그래서 골고루 일하고 전문 분야가 되는 거예요. 한국은 자기네만 독식해서 얘들에게 박봉을 주고 부려 먹으려 해요. 시스템이 잘못된 거지. 후배들이 그 많은 재료비를 들여 공부하는데도 기회가 한 번도 없습니다. 특수분장 업체만 50개가 넘어요. 일이 없으니 대부분 학원을 차리거나 핼러윈 데이 때 분장을 하고 있는 거죠.”

그의 또 다른 관심사는 핼러윈 문화다. 그는 “누구나 다 자기 표현을 할 수 있기에 핼러윈 문화가 굉장히 중요하다”며 “관광객들이 핼러윈을 즐기러 한국에 오는 데 보탬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그의 일생일대 과제는 노역 분장이다.
홍기천 특수분장감독은 지난 20일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특수분장에 입찰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상배 선임기자
“노역 분장을 다시 한번 연구해 개발하고 싶어요. 서양 사람들은 노역 분장하기 쉬운데 한국 사람은 얼굴이 넓적해 (실리콘 등을) 붙이면 더 넓적해져. 안 어울려요. 어울리게 하는 방법이 뭘까, 제대로 연구해 후배들에게 전수해 주고 싶어요.”

영화감독의 꿈도 이루고 싶다.

“그동안 시나리오를 두 편 썼어요. 하나는 20년도 더 됐는데 봉준호 감독 ‘괴물’과 비슷했고, 다른 하나는 2002년에 쓴 건데 ‘아빠와 크레파스’라고 유전자 공학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손대면 안 될 유전자에 손대는 바람에 가정이 파괴되는데 해피 엔딩으로 끝나요. 이걸 영화로 한번 해보고 싶어요.”

박진영 기자 jy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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