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룸] 북적북적 77 : 먹고 마시고 살며 생각하고..'미식 견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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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고향과 이어주는 끈에는 참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위대한 문화, 웅대한 국민, 명예로운 역사. 그러나 고향에서 뻗어나온 가장 질긴 끈은 영혼에 닿아 있다. 아니, 위(胃)에 닿아 있다. 이렇게 되면 끈이 아니라 밧줄이요, 억센 동아줄이다."
바뀌는 듯 마는 듯 맞이한 새해 2017년도 3주나 지났습니다. 새해 결심을 하셨다면 설 연휴를 앞두고 한번 되돌아볼 때 같기도 합니다. 최근 읽은 책들을 돌아보니 온통 신간 일색이라 조금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는 책을 골랐습니다. 출간된 지 약간 지났으나 최근 다시 출간이 됐으니 다소 오래된 새책입니다. 지난 북적북적에서 변호사, 기자, 판사에 이어 이번엔 어떤 이가 쓴 책을 읽을까요, 했는데 동시통역사이자, 작가인 요네하라 마리의 책 '미식견문록'을 가져왔습니다.
작가 설명을 잠시 하자면, 1950년생인 요네하라 마리씨는 러시아어 동시통역사면서 에세이를 많이 썼고 소설도 쓴 바 있는 작가입니다. 어려서 체코 프라하에서 6년 살았기 때문에 러시아어를 배웠고 전공도 러시아어로 하고 통역사의 길을 가게 됐는데, 이 프라하에서의 체류가 마리상에겐 인생의 큰 경험이었고 이 시절을 회고한 책 '프라하의 소녀시대'도 마리상의 걸작 중 하나입니다. 너무나 읽고 싶은 책이었으나,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소녀시대 멤버 수 이상으로 소녀들이 많이 나와서 도저히 그녀들의 대화를 재연할 자신이 없어 포기하고 못지 않게 제가 좋아하는 책 '미식견문록'을 골랐습니다.
통역과 관련한 에피소드로 시작, 음식으로 이어져 삶을 통찰하는 자연스런 글 흐름과 글 솜씨가 돋보이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먼저 읽겠습니다. AI나 달걀 파동이 이어지고 있으니 시의적절할 수도 있겠습니다.
"...카스텔라를 먹고 있는데 어머니가 "어, 거기도 달걀이 잔뜩 들어 있는데" 하셨다. 그 순간, 팔딱거리다 죽어간 병아리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면서도 나는 계속 카스텔라를 먹었다. 기왕 독毒을 먹을 거면 접시까지 핥자는 심정이었다."
"먹는다는 것과 산다는 것, 이는 어찌 이리도 잔혹하고 죄 많은 일인가. 살생의 죄책감과 맛있는 것을 먹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 이 모순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른이 된다는 것일까. 그날 이후, 나는 다시 달걀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저도 먹는 걸 참 좋아하고 음식 관련 글을 읽거나 먹방을 보는 것도 좋아합니다만, 마리상을 따라갈 순 없을 것 같습니다. '할바'라는 어려서 단 한 번 먹어본 전설의 과자를 수년에 걸쳐 찾아보는 과정을 담은 글 또한 참 인상적이었는데 이어서 읽어보겠습니다.
"딱 한 입. 그 한 입에 나는 할바에 홀딱 반했다. 아아, 할바 먹고 싶어라. 원 없이 한없이 할바를 먹고 싶다. 게다가 여동생이며 부모님께도 맛보이고 싶었다. 할바가 얼마나 맛있는지 그 어떤 말로 설명해도 알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맛있다. 하지만 다르다. 이이라의 할바는 이렇지 않았다. 이리 되면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어린 시절 단 한 입 맛본 것을 내 멋대로 미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 정말 이 맛과 다름없을지 몰라. 행복의 '파랑새'가 실은 가까이 있었다고 알게 되는 틸틸과 미틸, 아니 동경해온 첫사랑을 다시 만나보니 그저 평범한 남자였다는 것을 알게 된 여자 마음이 이런 건가 하고 체념하기 시작할 무렵, 역시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 어렸을 때도 바나나가 그렇게 흔하거나 저렴한 과일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달라졌습니다. 저와 30년 가까이 차이가 나지만 마리상도 그랬다는데 늘 바나나를 사와서 바나나 삼촌이라 불렸던 삼촌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글도 좋았습니다.
"식도락으로 몸이 상하셨는지 삼촌은 만년에 당뇨병으로 고생하셨다. 대식가인 삼촌에게 맛있는 것을 못 먹는 건 참기 힘든 일이었으리라. 그래도 내가 찾아가면 삼촌은 정성을 다해 식사 계획을 짜주셨다. "점심은 치쿠요테의 도미국밥이 좋겠구나. 저녁은 로열 호텔의 로스트비프로 하렴." 당신이 이런 것을 못 드시니 이런 저런 요리를 상상하며 즐기시는 것 같았다."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삼촌은 눈을 감고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역 도시락은 팔각도시락으로 해라...." 내게는 이 말이 그 일주일 뒤 세상을 뜨신 삼촌이 남긴 마지막 말씀이 되었다."
요네하라 마리의 책들은 읽기 쉽고 재밌습니다. "다감하면서도 날렵하고 섬세하며 유머를 담고 있어 여느 문필가가 쉽게 다다를 수 없는 경지에 있다, 나는 요네하라 마리의 충성스러운 독자다, 생전에 한번 만나봤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숭배자이기도 하다"라는 게 요네하라 마리의 책에 대한 고종석 선생의 촌평이기도 합니다.(2009년 발간된 책 뒷표지에 적혀 있습니다.) 100%, 200% 공감합니다. 마리씨는 2006년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미식견문록은 2009년 발간된 버전입니다만, 마리상의 책들 중에서도 특히 인기 높은 책들을 모아 마음산책에서 최근 문고판으로 다시 펴냈습니다. 2009년 버전도 좋습니다만, 새로 나온 5권짜리도 탐나는 디자인... 심지어 2009년보다 가격도 저렴합니다. 편하게 읽으면서 들으면서 생각도 잠깐해보는 그런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출판사 마음산책으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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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구 기자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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