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역사·문화가 모두 땅에서 나오는데..

2012. 1. 20.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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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번역원과 떠나는 지식여행지리와 인문이 어우러져 문명 이룩…풀 한포기, 흙 한줌도 위대한 유산조선 후기 역사가 이종휘 "중국 못잖은 축복의 땅" 예찬

이 땅은 아름답다. 봄꽃이 피고 여름 소낙비가 내리는 풍광이 아름답다. 가을 단풍이 물들고 겨울 눈발이 날리는 풍광이 아름답다. 대지의 축복이다.

풍광이 아름다운 데 이유는 없다. 화려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위대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어쩌면 누추할지 모르고 어쩌면 왜소할지 모른다. 하지만 풀 한 포기, 흙 한 줌도 우리와 함께 살아있음에 고마움을 느낀다. 그래서 아름답다. 이 땅의 아름다움을 추억하며 소소한 상념에 잠겨 있다가 문득 누구보다 이 땅을 사랑했던 선비의 글 하나 생각나 옮겨 본다.

그의 이름은 이종휘(李種徽·1731~1797), 《동사(東史)》를 지은 역사가다. 그는 《수산집(修山集)》의 '동국여지승람의 뒤에 부친다(題東國輿地勝覽後)'에서 이렇게 썼다.

'천하의 이름난 산과 큰 강을 말할 때 반드시 오악(五岳·중국의 오대 명산)과 사독(四瀆·중국의 사대 강)을 꼽는다. 안탕산과 나부산은 산세가 하늘에 닿고, 부강(府江)은 함께 섞여 바다와 가없지만, 성명문물(聲明文物)과 예악도수(禮樂度數)는 저쪽에서 나고 이쪽에서 나지 않으니, 크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종휘는 이어 조선은 중국 못잖은 자연과 함께 문화가 살아있는 곳이라고 말한다.

'지금 온 천하가 오랑캐 땅이 되었는데 머리 깎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사람들 사이에 의관조두(衣冠俎豆)와 문물예악(文物禮樂)을 지키는 나라가 있다. 그 나라는 기자(箕子)가 봉해진 곳이요, 그 인민은 반만명 은나라 사람의 후예요, 그 이름이 천하에 알려진 것이 고군자국(古君子國)이다. 지금 세상에서 추로(鄒魯)의 풍속으로 의관을 하고 있고 이락(伊洛)의 풍속으로 예의를 지키고 있다. 저기 불룩하고 우묵한 것이 다시 오악과 사독에 양보함이 없다.'

그러면서 도덕문명을 영위하고 있는 이땅을 '동주(東周)' 또는 '소중화(小中華)'라고 불러 《동국여지승람》을 《동주직방지》나 《소중화광여기》라고 바꿔도 좋겠다고 말한다.

'옛날 맹자는 등나라 임금에게 권하기를 "왕자(王者)가 일어나면 취해 법으로 삼으라" 했으니, 압록강 동쪽을 들어 강한(江漢)의 풍속을 기대해도 주(周)의 이남(二南)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논어》에서는 "나는 그 나라를 동주(東周)로 만들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 이 책은 '동주직방지(東周職方志)'라 불러도 좋다. '소중화광여기(小中華廣輿記)'라 일러도 좋다. 《동국여지승람》이라고 한 것은 황조(皇朝)의 세상을 만난 배신(陪臣)의 말이었다.'

역사와 지리는 국가 지식의 보고(寶庫)다. 그 나라의 시간과 공간이 여기에 담겨 있다. 조선시대 국가 지식의 보고는 《동국통감》과 《동국여지승람》이었다. 그런데 《동국통감》을 누가 읽느냐는 옛말에서 볼 수 있듯 이 책은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동국여지승람》은 다행히도 그런 옛말은 보이지 않지만, 역시 후대로 갈수록 실용적인 가치는 낮아졌다.

하지만 황윤석과 동시대를 살았던 이종휘는 《동국여지승람》에서 기쁨을 느꼈다. 아니, 가슴 벅찬 감동을 받았다. 그 고전적인 가치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이종휘가 《동국여지승람》에 특별한 애착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천부적인 산수벽(山水癖) 때문인 것 같다. 이 땅의 아름다움을 몹시도 사랑했던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 땅 전체를 다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래서 조선의 국토를 흐르는 물줄기의 원위와 형세를 자세히 연구해 《청구수경(靑邱水經)》을 지었다.

이종휘가 사랑한 이 땅이 단지 아름다운 산수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 이 땅은 자연과 더불어 문화가 있는 곳이고, 오늘날의 사람과 더불어 옛 사람이 살았던 곳이다. 부여나 경주와 같은 고도(古都)에 가도 옛 역사를 까마득히 망각하고 단지 산수만을 볼 뿐이라면, 폐허로 남은 유적지를 보아도 아무런 사연을 생각지 않고 망설임 없이 휙휙 지나갈 뿐이라면, 그는 진정으로 이 땅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내가 태어난 이 땅이 곧 옛 사람이 태어난 동방의 나라이고, 내가 타고난 언어와 기품과 성정이 곧 옛 사람도 타고난 동방의 풍기라는 사실에 감동할 수 있는 사람, 내가 보는 수풀과 들판을 옛 사람도 보았고, 내가 입는 옷과 먹는 음식도 곧 옛 사람이 입고 먹었다는 사실에 감동할 수 있는 사람, 이 땅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다. 이종휘는 이런 마음으로 《청구고사(靑邱古史)》를 지었다.

지리와 역사가 어우러져 문화를 이룩한다. 이 땅을 사랑하는 마음은 근원적으로 이 땅의 역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확대되고 이는 과거에서 현재까지 전승된 이 땅의 문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확대된다. 나의 순수한 양지(良知)가 이 땅과 만날 때, 그 땅은 역사가 되고 문화가 되어 찬란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이종휘는 양명학에 공감한 인물이다. 양명학의 정감으로 이 땅의 아름다움을 심득(心得)한 순간, 그것을 표현하고 싶은 열정을 견디지 못했다. 그것이 《청구수경》과 《청구고사》의 편찬으로 이어진 것이다.

새해에는 이 땅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산을 깎아 버리고 강을 파헤쳐 버리고 바다를 메워 버렸던 이욕(利慾)의 세파가 맑게 정화되었으면 좋겠다. 이 땅이 곧 역사이고 문화이며 문명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인문학적인 감성이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www.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노관범 < 가톨릭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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