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 없고 월세는 부르는 게 값.. 이제 불가능해진 '대전(대치동전세)살이'
서울 대치동에서 전세살이를 하고 있는 직장인 성유진(48)씨는 당장 1년 뒤에 계약이 만료됐을 때 상황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집주인이 들어와 산다고 나서지 않으면 괜찮지만, 만약 실거주 의사를 밝히면 새 전셋집을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씨가 바라는 건 중학교 2학년 아이가 이 곳에서 무사히 고등학교까지 졸업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끝없이 오르는 전·월세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젠 능력 밖이라는 생각이 들어 무기력해진다. 성씨는 "내가 회사에 간 사이에 아이가 안전한 환경에서 열심히 공부하면서 지낼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젠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앞으로는 자녀 교육 목적으로 학군지인 강남구 대치동으로 이사가 전세를 사는 이른바 ‘대전 살이’도 ‘찐부자(진짜 부자)’만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학군지에 집을 가진 집주인이나 거액의 전·월세를 대출 없이 감당 가능한 고소득자만이 자녀를 학군지에서 키울 수 있는, 단단한 성(城)이 만들어진 것이다. 임대차 3법으로 전세 물건이 자취를 감추고 월세가 치솟은 탓이다. 9억원 초과 아파트를 가지고 있는 경우 전세자금대출이 막힌 것도 영향을 줬다.
◇ "대치동 학군지, 이제 찐부자만 살 수 있다"
대치동 학군지에서 아이를 키우려면 이제 학군지에 집을 사거나, 고가의 월세를 감당할 수 있어야만 하는 시대가 됐다. 15억원 초과 아파트에 대해서는 대출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집값 전액을 대출 없이 융통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면 수백만원에 이르는 월세를 감당해야 한다.
21일 서울 대치동 일대 복수의 공인중개업소에 따르면 2년 전까지만 해도 6억~7억원 안팎의 전세금을 마련하면 대치동에서 자녀를 키우는 일이 가능했다. 재건축을 기다리는 노후 아파트가 많다 보니 집값은 비싸지만 전세금은 쌌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대치동 일대 아파트의 전세는 씨가 말랐고 월세 가격은 급등했다. 대치동 ‘래미안대치팰리스’ 전용면적 94㎡가 보증금 7억원에 월세 450만원(전세가 환산액 약 22억원)에 계약을 완료했다. 대치동 ‘개포우성1차’ 전용면적 84㎡의 경우 보증금 1억원에 월세 390만원(전세가 환산액 약 14억원)으로 세입자를 구하다가 복수의 세입자가 계약 의사를 밝히자 470만원으로 월세를 올렸다.
그나마 거래 가능한 물건도 많지 않다. 대치동 우·선·미로 불리는 ‘개포 우성1차’, ‘개포 우성2차’, ‘선경1·2차, 한보미도맨션’은 전체 4608가구에 이르는데, 이 단지들의 전세 물건은 총 9개, 월세는 9개 뿐이다. 지은 지 오래돼 대치동에서 가장 전세값이 싼 은마아파트 4424가구의 전세 물건은 5개, 월세 물건은 7개다.
A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개포 우성1차 전용면적 84㎡짜리 주택이 보증금 5억원에 250만원(전세가 15억원), 대치 삼성아파트 전용면적 59㎡짜리 주택이 보증금 3억원에 250만원(전세가 11억원)에 나와있다"면서 "발품 팔고 돌아다녀봐야 이게 가장 저렴한 물건"이라고 했다. B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한보미도맨션 전용면적 84㎡ 보증금 7억원에 120만원(전세가액 11억원), 지은 지 오래돼 대치동에서 가장 전셋값이 싼 은마아파트 전용면적 84㎡ 보증금 3억에 230만원(11억원)인데 계약금을 빨리 넣는 편이 좋다"면서 "물건이 많지 않아서 중개업소끼리 공유도 안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직장인 황모(43)씨는 "지금은 전세로 살고 있긴 하지만, 이 계약이 끝나면 대치동에서 살 수 있을 지 의문"이라면서 "전세를 구하면 다행이겠지만, 월세로 계약을 바꾸게 되면 자녀 둘의 학원비까지 감안했을 때 이곳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건 언감생심인 것 같다"고 했다.
전세 물건도 얼마 없지만 전세 자금을 융통해서 오기도 쉽지 않다. ‘대전살이’를 택한 이들 중 상당수는 본인 집을 전세로 내주고 융통한 자금에 전세자금대출을 받아 대치동에서 전세로 사는 것을 택해왔다. 하지만 이 공식은 지난 12·16 부동산 대책으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정부가 시가 9억원 초과 주택을 가진 1주택자가 전세자금대출을 받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9월 기준 서울의 아파트 중위가격은 9억2017만원(KB 부동산시세)에 이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서울 아파트를 가진 사람은 웬만해선 전세자금대출을 이용해 대치동 전세를 들어오지 못하게 됐다. 대치동 인근 공인중개사는 "그때 이미 한 번 철벽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2년 전만해도 상황이 이렇지는 않았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에 따르면 2018년 10월 은마아파트 전용 면적 101㎡의 전셋값은 4억1000원~5억5000만원이었다. 선경1차 전용면적 84㎡의 전세가격도 8억~9억원 수준이었다. 대치동은 아니지만 학군을 공유하는 ‘도곡렉슬’ 전용면적 86㎡ 전세값도 6억9000만~9억원 수준이었다.
도곡동 인근 공인중개사 관계자는 "2년 전만해도 온 가족이 6년만 긴축으로 살아보자고 결심하면 대치동 살이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면서 "그런데 이젠 어렵다. 30억~40억원을 주고 집을 사거나 15억~20억원을 주고 전세를 얻든가, 고액 월세를 내야 하는데 중산층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 됐다"고 했다.
◇ "학군지 수요는 느는데 각종 법이 공급 줄여"
전·월세가 이토록 올라가는 이유는 학군지에 입성하려는 이들이 더 늘었기 때문이다. 수요는 늘었는데 임대 주택은 임대차 3법이나 세금 강화 등의 여파로 오히려 줄었다.
우선 수요면에서는 당장 인근 학교를 배정 받기 위해 11월 전까지 전입신고를 마치려는 이들이 늘었다. 여기에 정부가 지난해 내놓은 교육제도 개편안도 영향을 주고 있다. 교육제도 개편안은 자율형 사립고·외국어 고등학교 폐지, 정시 확대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모두 학군지 학교의 인기를 더해주는 정책이다.
여기에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여파도 학군지 입성의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사교육에 의지하지 않으면 아이들의 학습량이 현저히 낮아진다는 우려가 커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김현진(35)씨는 "전업주부인 엄마를 뒀다면 아이들 학습관리가 되겠지만, 맞벌이 부부는 아이들 관리를 전혀 할 수 없다. 아이가 좀 크면 걸어서 학원에 다니는 학군지에서 키우는 것이 최선이다"고 했다.
그런데 공급은 더 줄었다. 통상은 자녀 교육을 모두 마친 전세입자들이 자리를 내주면서 손바뀜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데, 이번에는 임대차 3법 등이 변수로 작용했다. 거주하지 않고 임대를 하던 집주인들이 들어오겠다고 나서면서 임차 물량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내년부터는 장기보유특별공제를 받으려면 2년 실거주 요건을 채워야 한다. 또 거주기간에 따라 장기보유특별공제율이 달라진다. 대치 미도상가의 한 인테리어업체 관계자는 "은마아파트에서만 실입주 하겠다는 집주인의 인테리어 의뢰를 줄줄이 받고 있다"고 했다.
여기에 집주인들이 전세보단 월세를 선호하는 현상이 급증했다. 저금리 기조인데다 세금 부담이 커진 것이 보증금을 줄이고 월세액을 높이는 분위기에 불을 지폈다. 대치동 은마상가의 한 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은퇴 노부부가 집주인인 경우는 10곳 중 9곳이 월세를 놓겠다고 한다"면서 "보증금은 깎아줘도 월세는 안 깎아준다. 종합부동산세와 건강보험료 증가분을 월세로 메워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문제는 당분간은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는 점이다. 고준석 동국대학교 겸임교수는 "강남 등 학군 좋은 지역에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줄어들지 않는데 새 아파트 공급은 물론 전세공급까지 턱없이 부족하니 전셋값은 앞으로도 계속 오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자녀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만이라도 교육환경이 좋은 학군지에서 자녀를 키우고 싶었던 이들의 절망감도 커지고 있다. 직장인 신모(36)씨는 "월세액이 한 달 월급과 거의 맞먹는 수준이라 언젠가 때가 되면 학군지에서 아이를 키우려던 꿈은 접어둬야 할 것 같다"면서 "결국 부의 대물림이 교육 격차로까지 이어질까봐 우려스럽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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