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세 턱밑까지 오른 공시가격.. 이러다 역전될라

이송원 기자 2020. 3. 20.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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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구체적인 기준 공개안해]
작년 아파트값 고점 찍던 연말 시세로 공시가격 산출
코로나에 집값 5억 떨어졌는데 공시가격은 4억 오르기도

서울 성동구 30평대 아파트에 사는 40대 직장인 A씨는 올해 자기 아파트 공시가격이 24% 오른 것을 확인하고 화가 치밀었다. 작년에 집값이 좀 오르긴 했지만 손에 돈을 쥔 것도 아니고, 우한 코로나에 따른 경제 위기로 보유 주식 폭락에, 실직 위기까지 처했기 때문이다. 공시가격 인상으로 보유세 등 세금만 한 해 100만원 이상 더 내게 생겼다. 그는 "정부 말대로라면 내가 전국 상위 5% 아파트를 가진 부자라는 건데, 왜 이렇게 먹고살기 힘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개별 아파트 공시가격이 19일 공개되면서 '세금 폭탄'을 맞은 주택 소유자들이 들끓고 있다. 고강도 부동산 규제와 우한 코로나 여파로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집값은 하락세에 접어들었는데 세금은 늘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부동산 커뮤니티엔 "경제 위기에 따른 각종 지원책이 나오는 마당에 세금 폭탄을 떠뜨리니 집 가진 사람은 국민도 아니냐"는 성토 글이 쏟아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시장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정치적 목적에 휘둘려 공시가격을 급격히 올리다 보니 부작용이 속출하고, 납세자 불만이 폭주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시세 턱밑까지 오른 공시가

본지가 19일 서울 아파트 단지의 올해 공시가격과 최근 실거래 가격을 조사해본 결과, 공시가격이 실거래가를 거의 따라잡은 사례가 속출했다. 강남구 도곡동 '도곡렉슬' 115㎡(이하 전용면적)의 올해 공시가격은 작년보다 5억8900만원(37%) 뛰어 21억7300만원이 됐다. 지난달 실거래가(24억1000만원)의 90%에 이른다. 서초구 반포동 '반포리체', 송파구 잠실동 '리센츠' 등도 공시가격이 실거래가의 80~90%에 달했다.

공시가격과 실거래가 차이가 급격히 좁혀진 것은 정부가 공시가격을 '강남 집값 잡기'의 도구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현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공시가격을 대폭 올려 다(多)주택자와 고가 주택 보유자의 세금 부담을 늘리는 방식으로 주택 매각을 유도하고 있다. 박선호 국토교통부 차관은 19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다주택자나 고가 주택 소유자는 집을 팔면 세금 부담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작년 연말 시세를 기준으로 올해 공시가격을 산출했다. 작년 연말은 아파트 값이 고점(高點)을 찍던 시기였다. 하지만 정부가 대출 규제를 강화한 12·16 대책, 규제 지역을 확대한 2·20 대책 등 부동산 규제를 잇따라 내놓은 상황에서 우한 코로나 사태까지 겹치면서 집값이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공시가격과 시세가 별 차이 없게 된 것이다.

정부가 공시가격과 시세 간 격차를 둬 온 것은 이유가 있다. 과세 기준이 되는 공시가격은 1년 동안 변하지 않지만, 시세는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시세가 급락해 공시가격 밑으로 떨어지는 경우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과거 정부는 공시가격을 시세보다 30% 이상 낮게 유지해왔다. 결국 최근처럼 시장이 냉각기에 접어들면 집값은 떨어지는데 공시가격이 올라 세금 부담이 급증하는 사례가 나타나는 것이다. 서울의 도곡렉슬, 반포리체는 작년 말 고점 대비 실거래가가 5억원가량 떨어졌지만, 보유세는 각각 1117만원, 868만원으로 작년보다 46% 늘게 됐다.

노태욱 강남대 교수는 "공시가격을 급하게 올리면서 산정 절차나 기준이 되는 시세도 공개하지 않고 있어, 납세자들이 알 권리를 침해당하고 있다"면서 "세금에 대한 저항감이 높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시세·공시가격 역전될 수도

집값 하락세가 본격화하면 공시가격이 실거래가를 뛰어넘는 '역전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 최근 고가 아파트 대출 규제, 자금 출처 조사 강화, 우한 코로나발(發) 투자 심리 위축 등의 영향으로 작년 말 대비 수억원 내린 급매물이 늘면서 공시가격과 실거래가 차이가 거의 없는 경우도 나오고 있다.

성동구 '서울숲힐스테이트' 143㎡의 지난달 실거래가는 15억6000만원, 올해 공시가격은 14억6200만원으로 둘 간 격차가 1억원이 안 된다. 심교언 건국대 교수는 "고가 주택은 거래량도 많지 않고, 시장 분위기가 꺾이면 시세 하락 폭도 클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완충 지대가 더 필요하다"며 "외환 위기나 금융 위기 같은 경제 위기가 닥쳐 서울 집값이 크게 떨어지고 공시가격이 집값을 뛰어넘게 되면 사회적으로 논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공시가격 인상에 반발한 주택 소유자들의 이의 신청도 폭주할 전망이다. 서울 공시가격이 14% 급등했던 지난해 이의 신청 건수는 2만8753건으로 2007년 이후 1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올해는 경제도 안 좋은 상황에서 과속 인상이 이뤄진 만큼, 작년보다 더 많은 이의 신청이 접수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의 신청을 원하는 사람은 한국감정원이 운영하는 '부동산 공시가격 알리미' 홈페이지에서 다음 달 8일까지 할 수 있다. 정부는 제출된 의견을 토대로 공동주택 공시가격을 확정한 후 다음달 30일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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