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경제기획] 23년 전 8월 12일 '남북통일작전' 베일 벗다
제5공화국 시절인 1982년 2월. 훗날 위의 별칭이 붙은 사건에 대한 첫 보고가 옛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에 전해졌다. 시중에서 정체불명의 어음이 헐값에 대량 유통되고 있는데, 특히 1956년 설립된 건설업체인 공영토건이 발행한 어음은 반값에 팔린다는 정보였다. 고(故) 유학성 당시 안기부장은 처음엔 “터무니없다”며 믿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證市(증시)에 주식이 상장된 공개법인이고 해외 건설 실적도 큰 대형업체 어음이 이같이 반값으로 나돈 것은 종전에는 없던 일. (경향신문, 1982년 5월 11일자)’이라는 보도가 나올 정도였다.
피해자가 속출하고 세상이 떠들썩해지자 전두환 전 대통령은 그해 7월 이른바 ‘7·3조치’를 내놨다. 이듬해 7월부터 모든 금융거래를 실명으로 하도록 하는 ‘금융실명제’를 전면 실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전 전 대통령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정치권·재계가 “저축 감소와 경기 침체 부작용이 우려된다”며 거세게 반대하자, 그해 12월 금융실명제를 1986년 이후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날 시행하겠다며 7·3조치를 번복했다.
이후 1988년 7월 노태우 전 대통령도 금융실명제를 1991년부터 전면 실시하겠다고 했다가 “시기상조”라는 반대 여론에 떠밀려 유보했다. 두 전임 대통령은 훗날 재임 기간 막대한 액수의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이 드러났다.
# 칼국수 먹자고 해서 갔더니 … YS의 결단
1993년 8월 12일 오후 7시 45분. TV 앞에 있던 국민들은 하단에 뜬 ‘대통령 긴급명령 발표’ 자막에 깜짝 놀랐다. 이어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청와대 본관 1층에 선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YS가 말했다.
YS는 담화문에서 “금융실명제를 하지 않고는 이 땅의 부정부패와 정경유착을 원천 봉쇄할 수 없다”고 밝혔다.
“YS는 취임 후 첫 3개월간 일요일마다 나를 관저로 불러 금융실명제의 검토를 지시했다. 나는 금융실명제를 입법 조치가 아닌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시행해야 하며, 시행하더라도 경기가 확실히 회복되는 1994년 봄에 발표하는 게 낫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YS는 취임 첫 해에 이 일을 마무리하겠다고 결심했고, ‘이런 어려운 일은 취임 후 6개월 내 처리 못 하면 영원히 못 한다’고 했다.”YS는 생전의 회고록에서 일을 극비리에 추진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기득권의 저항을 피하기 위해선 국회에서 법으로 만들기보다 대통령 긴급명령이란 형식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이었다….”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앞서 YS는 대선 때 금융실명제를 공약했고, 취임 후엔 “공약을 지키겠다”면서도 시기를 언급하진 않았다. YS는 이 일이 정·재계 동의를 얻지 못할 걸 알고 결단력을 발휘했다.
“우리가 어느 정도 준비를 하고 보고하러 갔더니 YS는 직접 헌법 책을 가지고 나와 펼치면서 ‘이 조항을 빌어 긴급명령으로 하자’고 했다. 사실 공론화를 거치면 실무자 입장에선 더 안전하다. 발생 가능한 문제점이 부각되면 그걸 보완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 정부 출범 시점에서 이런 뉴스로 정부가 흔들리다가 시행이 표류되면, 결국 소도 잃고 외양간도 잃는 결과가 벌어질 것이기 때문에 대통령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다….” (『희망에는 마침표가 없다』)
금융실명제를 준비한 실무진 전원은 사표부터 썼다. YS는 “비밀이 누설되면 실무진 전원을 구속시키겠다”며 “목숨 걸고 비밀을 지킬 것”을 주문했다. 이에 14명의 실무진은 두 달여 간 집에서 출퇴근하는 대신, 경기도 과천의 주공아파트(5단지 304호)와 서울 강남의 휘문고등학교 앞 건물 등지에서 ‘거의 감금된 채’로 합숙 생활을 했다. 일부는 해외 출장을 갔다가도 귀국하자마자 다시 합숙하러 갔다. ‘남북통일작전.’ 이들이 철저한 보안 유지를 위해 붙인 작전명이었다. ‘국제투자연구소 사무국.’ 휘문고 앞 사무실에 붙인 위장 간판이었다.
당시 사무관으로 실무진에 포함됐던 백운찬 한국세무사회장(전 관세청장)은 “보안 문제로 과천에서 합숙하면서 가족들한테는 해외 출장을 갔다고 둘러대기도 했다”며 “비밀 유지가 없었다면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회고했다.
# 경악을 금치 못한 정·재계
대통령의 발표 직후 정·재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국내 증시는 이틀간 8.2% 폭락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면 은행에 있던 거액이 빠져나가 금리가 폭등하고, 증시에서도 자금이 계속 이탈할 거란 우려가 들어맞는 듯했다. 이경식 부총리는 보고했다. “각하,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1~2%포인트는 떨어질 겁니다.” 금융실명제를 ‘개혁 중의 개혁’이라 칭했던 YS는 일축했다. “그 정도는 각오해야지!”
비실명계좌를 통한 탈세 및 자금 세탁이 어려워지면서 부정부패·정경유착의 고리도 끊기기 시작했다. 검찰은 자금 추적을 통해 두 전 대통령(전두환·노태우)의 뇌물 수수 사실을 적발했다. 초기 4%였던 문민정부의 경제성장률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전까지 7~8%대(1994~1996년)를 기록했다. 1995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가 열렸고(1만1735 달러, 1993년엔 8402달러),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도 가입했다.
보완점도 발견됐다. 금융실명제 도입 이후 갈 곳을 잃은 지하자금이 부동산으로 쏠리면서 명의 신탁에 의한 투기와 음성 불로소득이 발생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정부는 1995년 1월 6일 ‘부동산실명제’ 도입을 발표, 부동산의 모든 차명거래를 금지했다. 같은 해 7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1년의 유예기간을 두고 모든 부동산을 실명으로 등기하도록 했다.
종전엔 ‘합의’ 하에 실소유자에게도 인정되던 차명계좌 소유권을 명의자로만 제한했다. 실소유자는 본인 자금임을 적극 입증해야만 하게 됐다. 불법 차명거래로 밝혀질 경우 실소유자와 계좌 명의자, 알선·중개자까지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 벌금형의 처벌을 받게 됐다.
# 공과(功過) 많은 대통령의 최대 치적
금융실명제는 IMF 외환위기 등 대통령으로서 과(過)도 많은 YS의 최대 치적으로 평가된다. 금융거래의 투명성이 확보되면서 ‘한국 사회에선 당연한 듯 행해지던’ 부정부패·정경유착 사례가 줄었다. 지하경제 규모는 꾸준히 작아져 2013년엔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3%까지 개선됐다(다만 여전히 OECD 회원국 중엔 상위권이다).
특히 대통령 긴급명령이라는 과단성 있는 조치로 기득권 저항을 물리치면서 금융실명제를 실시한 건 오직 YS라서 가능했다는 평이다. YS는 회고록에서 “1993년 당시 가명·차명계좌에만 국내 전체 금융자산의 10%, 총 통화의 33%인 약 33조원의 자금이 쏠렸다”며 금융실명제의 의의를 설명했다.
금융실명제를 준비한 실무진의 일원이었던 진동수 전 금융위원장은 “금융실명제 실시는 시대적 숙명이었다”면서 “모든 금융거래를 투명화하고 과세 기반을 마련했다는 데 큰 의미를 둘 수 있다”고 전했다. 그의 말대로 제도 시행 후 세원 노출로 보다 안정적인 세수 확보가 가능해졌다.
홍재형 전 부의장은 “금융실명제가 사회의 만병통치약이 되진 못했지만, 차명 거래에 따른 불편과 불이익이 유발되면서 금융거래의 질서가 보다 건전하게 바뀌었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선 각종 어록을 남겼다.
“너무 급히 달려도 위험하지만, 달리다가 멈추면 쓰러진다.” (1993년, 모범 수출기업 대표들과의 오찬에서 개혁을 멈출 수 없다며)
“아직도 골프를 열심히 치십니까?” (1993년, 경제5단체장과 만난 자리에서)
1994년 ‘개의 해’를 맞아서는 주요 공직자들을 ‘개’에 비유하는 화끈한 어법으로 개혁의 속도를 재차 강조하기도 했다. “개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 사랑을 받지만, 또 한편으로는 달리는 기차를 보고도 짖는다. 그러나 개가 짖는다고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금융실명제와 상보적 관계에 있는 제도로 ‘금융정보분석원(FIU)법(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이란 게 있다. 2001년 출범한 FIU는 금융회사로부터 자금 세탁 관련 ‘혐의거래보고(범죄가 의심되는 금융거래인 경우 금융기관 등이 의무적으로 보고)’ 등의 금융정보를 수집·분석한 뒤, 이를 경찰 등 법 집행기관에 제공하는 역할을 해왔다. 한마디로 금융회사를 통해 일어나는 범죄 자금 세탁(자금의 위법한 출처를 적법한 출처로 위장)을 예방하고, 외화의 불법 유·출입에 대처하는 기구다. 법무부·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국세청·관세청·경찰청·한국은행 등의 전문 인력으로 구성됐다.
몇 년전 전북 김제의 마늘밭에서 5만원권 돈뭉치 110억7800만원이 발견됐다. 이런 자금이 천년만년 마늘밭에 있을 수는 없다. 금융위원회 금융정보분석원 박광 기획행정실장은 "마늘밭 돈뭉치 같은 고액 현금도 소유자가 부동산 매매 등을 위해 쓰려면 반드시 은행 등 금융시스템 안에 들어와야 한다"며 "이런 과정에서 고액현금거래보고(CTR)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에필로그 : ‘김영란법’을 더하다
12일로 실시된 지 23년째인 금융실명제는 오늘날에도 시사점을 안겨준다. 헌법재판소의 지난달 28일 합헌 결정으로 다음달 28일부터 시행될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일명 ‘김영란법’ 역시 지금보다 청렴한 사회를 만들자는 데 주안점을 뒀다. 공직자뿐 아니라 언론인과 사립학교 교직원, 그 배우자까지 적용 대상이다. 한 번에 100만원, 연간 총 300만원 이상의 금품을 받으면 직무 관련성이 없어도 처벌된다.
과거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볼 때다. 오늘날 김영란법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기득권 유지를 위한 ‘엄살’에 불과한 건 아닌지, “경기 침체”라는 논리가 지나치게 기득권 편의적인 건 아닌지, 23년 전 실시된 금융실명제는 묻고 있다.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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