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굴 숨었다 학살당한 노인들…박선영 “경고 없었으면 불법이지만”

고경태 기자 2025. 4. 24. 09: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06차 전체위원회에서 발언 논란
22일 오후 열린 진실화해위 제106차 전체위원회에서 박선영 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국군의 빨치산 토벌 작전 도중 두려움에 떨던 노인들이 토굴에 숨었다가 군인들이 던진 수류탄에 죽었다면 이는 공권력에 의한 부당한 피해일까 아닐까.

박선영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장이 이를 부당하지 않다는 취지로 발언하며 진실화해위 회의에서 논쟁이 이어졌다. ‘국군이 ‘나오면 살려준다’고 경고를 했는데도 안 나왔으니 합법적이고 정당하다’는 논리다. 전투원도 아닌 민간인이 학살된 사건의 불법성을 부정한 발언에 대한 다른 위원들의 반발이 이어졌고, 논쟁이 격화되며 회의가 한 차례 산회되기도 했다.

22일 오후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에서 제106차 전체위원회가 열리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24일 진실화해위 위원들과 직원들의 말을 종합하면, 박선영 위원장은 22일 열린 제106차 전체위원회에서 ‘전북 완주·정읍·김제·장수·부안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3)’을 비공개로 심의하던 중 1950년 12월5일께 전북 완주군 동상면 신월리 웃마재 토굴에서 국군에 희생된 ㄱ씨와 ㄴ씨의 희생에 관해 ‘합법적인 군사작전 과정에 ‘나오라’고 두 번이나 경고했다면 민간인에 대한 불법 학살이 아니’라는 취지로 말했다.

희생된 ㄱ씨와 ㄴ씨는 당시 각각 67살, 71살이었다. ㄱ씨 손자(58)의 전문(전해들은 말) 진술에 따르면 당시 동상면은 빨치산의 소굴이었는데 국군의 토벌작전이 진행되자 두 사람은 웃마재 토굴에 숨었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런 사실은 같은 마을 이웃들의 전문 진술로도 나왔다. 참고인 ㄷ씨는 “현장을 본 목격자들이 ‘군인들이 굴 밖으로 나오라고 했는데도 무서워서 나오지 않자, 군인들이 수류탄을 던져 둘이 죽었고 불타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ㄷ씨는 해가 바뀌고 봄이 왔을 때, ㄱ, ㄴ씨의 시신을 이장할 때 수류탄으로 인해 시신이 온전하지 못한 것을 보았다고 한다. 당시 군인들은 완주군 고사면 소재지에 주둔하던 국군 제11사단 병력으로 확인됐다.

박선영 위원장의 발언에 대해 이상희 위원은 “한국전쟁 때도 비상사태하범죄처벌에관한특별조치령과 사형(私刑) 금지법이 있었다. 법률에 따라 처벌하는 게 박선영 위원장이 그렇게 자주 말하는 글로벌 스탠다드”라며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 토굴에 숨어 있다가 적법 절차에 의하지 않고 학살된 사건인데 불법성이 없다고 하니 놀랍고 의아하다”고 말했다. “총을 들고 싸운 것도 아니고 그냥 민간인이 후방 작전 중에 숨어 있는 상황에서 당한 희생 사건인데 정말 불법성이 없다고 보냐”고 이상희 위원이 재차 묻자, 박선영 위원장은 “경고 없이 했으면 그거는 100% 불법적인 것”이라고 답했다. 전시라도 민간인은 보호해야 하는 당시 국내법과 국제 기준이 아닌, ‘경고’의 여부가 불법성의 기준인 것처럼 언급한 것이다.

22일 진실화해위에서 제106차 전체위가 열린 날 진실화해위 앞에서는 국가폭력피해범국민연대 주최로 박선영 위원장 사퇴 기자회견이 열렸다. 삼청교육피해자·유족회 오수미 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국가폭력피해범국민연대 제공

이날 허상수 위원이 “(위원장의 생각이) 고루하고 반인권적”이라며 “군인의 딸이라서 군인을 편드냐”고 하자 박선영 위원장은 이에 대해 사과를 요구했고, 허 위원이 유감을 표명한 뒤 “이승만 시대의 냉전 논리가 너무 전면화돼 있다”고 하자 “내가 언제 이승만 찬양을 했냐. 2차, 3차 가해”라며 회의를 중단시켰다. 이로 인해 106차 전체위는 산회가 선포됐고, 저녁 식사 뒤 107차 전체위를 진행하는 식으로 회의를 이어갔다. 박 위원장의 부친은 베트남전 파병을 앞두고 훈련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문제는 논란 끝에 ㄱ씨는 ‘조사 중지’ 결정돼 차기 진실화해위로 넘겨진 반면, ㄴ씨는 진실규명됐다는 것이다. 내부에서는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 왜 ㄱ씨만 조사 중지했느냐”는 지적도 나왔다. ㄱ씨 피해는 1기 진실화해위가 있던 2009년 한차례 심의됐다가 진실규명 불능 결정이 난 바 있는데, 이옥남 상임위원은 새로운 참고인이 단순한 전문 진술자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말했다.

진실화해위 한 직원은 한겨레에 “박선영 위원장이 평소 가장 많이 쓰는 문구가 ‘글로벌 스탠다드'인데, 실제로는 국제기준에 완전히 어긋나게 말과 행동을 하고 있다. 군사작전이라 하더라도 민간인은 전투원과 구별해서 보호하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적인 국제기준(국제인도법)이다. 특히 이번에 조사 중지된 분은 도저히 전투력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 60대 이상 고령의 노인”이라고 꼬집었다.

한편, 박 위원장은 이날 고 차 아무개씨가 의무 복무 연한을 마친 후 본인의 의사에 반해 강제로 군 복무를 한 ‘군복무연한 종료 후 강제 복무 사건’에 대해 “공권력의 불법 행위로 하려면 고의성이 있어야 하는 데, 없어 보인다”며 진실규명에 반대하는 의견을 냈다가 다수 의원의 반대에 부닥치자 거둬들이기도 했다. 박 위원장이 계속 고의성 여부를 따지자 여당 추천 장영수 위원이 “직업군인도 아닌 의무병의 복무 연한을 지키지 않고서 복무하게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불법이다. 지금 현역 군인들 몇 달씩 더 잡아둔다면 난리 난다”고 지적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