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 몽땅 취소, 집 못 돌아간 천여 명...아직 끝나지 않은 산불
[김대홍 기자]
지난달 26일 오후 아내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같은 아파트 주민 중 한 분이 물까지 챙겨서 집을 떠나던데, 우리는 안 가도 괜찮은 거야?"
뉴스를 확인하니 안동 하회마을 근처까지 산불이 접근했다는 소식이었다. 경북도청신도시(경북 안동시 풍천면+예천군 호명읍) 내에 있는 우리집에서 하회마을까지는 7km, 차로 12분이었다. 그날 새벽까지 뉴스를 보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차하면 가족을 깨워서 대피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관련 기사: 집근처로 번진 불, 짐 싸둔 아내...안동은 일촉즉발 상황입니다 https://omn.kr/2crl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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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산불지역 임도주변 피해모습 |
ⓒ 기후재난연구소 |
산불 탓 마음 무거운 사람들, 만개한 벚꽃길을 피해 다녔다
기억에서 잊힌 단어인 '산불'이 다시 등장한 건 이웃에 의해서였다. 며칠 전인 18일 금요일 저녁, 아파트 이웃인 윤희준(38세, KT서비스 근무)씨가 산불 피해를 입은 안동 이재민들이 지금도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였다.
그는 하는 일이 KT 통신망 관리라서 KT망이 깔린 지역을 모두 살피는데, 담당구역이 그쪽이라 상황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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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체육관 놀이기구 뒤로 보이는 안동체육관 |
ⓒ 김대홍 |
순간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불이 꺼졌으니 이제 일상으로 돌아갔겠거니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참 안이한 태도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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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체육관 앞에 쌓인 일상회복 지원 키트. 주로 주민들에 당장 필요한 생필품들이 담겨 있었다. |
ⓒ 김대홍 |
소방관도 아닌 희준씨가 산불 일에 이렇게 깊숙이 개입해있다는 게 뜻밖이었다. 그는 불편한 상황이 올 한해 뿐만 아니라 내후년까지 갈 것이며, 다른 곳으로도 피해가 이어질 것이란 점도 일깨워줬다.
"경북 북부쪽엔 과수원이 많아요. 이번에 거기 여러 많은 곳들이 큰 피해를 입었어요. 올해 과일값 많이 비싸질 거예요."
이건 또 생각 못한 대목이었다. 지금 다시 과일나무를 심는다고 해서 바로 열매가 열리는 게 아니다. 지금 불탄 지역은 올해 안에 회복하기는 힘들다. 산불 지역인 안동, 청송, 영양은 우리나라에서 사과를 가장 많이 재배하는 지역이다. 영덕은 국내 송이버섯 최대 생산지다.
산불은 재난구역 내에 있었던 이재민들의 피해이기도 하지만 재난구역 밖에 있는 사람들, 주로 소비자들의 피해로 이어지는 문제였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봄엔 각 지자체들이 축제를 많이 연다. 축제는 지역민들과 방문객들이 즐기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지역 상인들에겐 대목이기도 했다. 특히 경북 북부 지역은 평상시엔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지역이라, 지역 축제는 사람을 모을 수 있는 꽤 중요한 이벤트였다.
"이번에 산불 피해지역 지자체들이 대거 축제를 취소하면서, 지역상인들이 모두 울상이예요. 매출이 많이 떨어졌어요."
아니나 다를까, 안동벚꽃축제(4.2-6), 의성 산수유축제(3.22-30), 영덕 황금은어 방류행사(3.26), 청송 어린이날 대축제(5.5)가 모두 다 취소됐다. 매년 산나물축제를 열었던 영양군은, 올해는 산불피해 극복을 위한 영양산나물 먹거리 한마당(5.9-11)로 행사를 바꾸었다.
모두 지역을 대표하는 큰 이벤트들이다. 특히 국립공원인 주왕산을 끼고 있고, 이로 인해 '산소카페 청송군'이라는 별칭까지 새로 만든 청송군(실제 청송 파천면엔 테마공원 '산소카페 청송정원'도 있다)은 앞으로 관광객을 끌어들이는데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희준씨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어떻게 이런 걸 다 아느냐"고 묻자, 그는 "원래 제 일이 북부쪽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살피는 일"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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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 주민들을 위한 임시주택 안동 권정생문학관 내 부지에 만들어진 모듈러 임시주택. 집 잃은 이재민들이 머물 임시주택이라고 한다. |
ⓒ 김대홍 |
"이제 산불은 다 없어졌나?"
아이들이 지닌 순수함은 확실히 힘이 있다. 여행 뒤 집에 돌아와서, 열심히 TV를 보고 있던 아들에게 말을 걸었다.
"응, 우리 방과후 선생님 어머니네 집이 몽땅 타버리셨대. 그래서 지금도 울고 계시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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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부 플래카드 안동시 곳곳에 산불 이재민들을 위한 기부 부탁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삶의 터전을 잃은 이웃들이 여전히 많다. |
ⓒ 김대홍 |
안동체육관은 안동에서 지리상 가운데에 해당한다. 서울로 치면 용산 정도 위치다. 안동체육관 앞엔 여러 단체에서 보낸 구호물품이 가득했다. 주로 당장 필요한 생필품들이 담겨 있었다.
안동시 권정생문학관 부지엔 모듈러주택 18동이 새로 만들어졌다. 집 잃은 이재민들이 머물 임시주택이다. 이들 시설들을 둘러보니 산불이 주민들에겐 '현재진행형'이라는 게 뚜렷하게 느껴졌다.
월요일 아침 아이들 등굣길에 오랜만에 지인 한 분을 만났다. 지인은 신분이 경찰이었다. 가벼운 호기심에 질문을 던졌다(경찰이라 덜 고생했을 거라 생각하며 던진 질문이었다).
"산불이 났을 때 혹시 많이 바쁘셨나요?"
"네. 저도 2주 동안 거의 집에 못 들어갔습니다."
아이코. 누군가에겐 짧은 과거형이 누군가에겐 긴 과거형이었고, 누군가에겐 과거형이 누군가에겐 현재진행형이었다.
얼마 전 찍어놨던 플래카드 사진을 다시 봤다. 거기 있는 계좌로 기부금을 보내기 위해 폰을 꺼냈다. 그때 누군가 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생각해 보니, 나와 헬스장을 같이 이용하는 그 지인은 직업이 소방관이었다. 재난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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