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한국에서 사라진 도시 "스스로 잊히는 길 택했다"
[윤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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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리시와 익산군 통합으로 이리란 이름이 사라진 지 30년이 되는 올해, <이리, 잊혀진 도시>(신귀백 저)가 출간됐다. |
| ⓒ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
1973년 경남 마산에 이어 우리나라 두 번째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되면서 한때 다른 도시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고, 1977년엔 도심 한복판 기차역에서 화약을 가득 실은 열차가 폭발하는 바람에 깊은 상처를 입기도 했던 도시, 그 이리가 사라진 지 어느덧 30년이 흘렀다.
도시가 정말로 사라진 건 아니다. 1995년 정부의 도·농(시·군)통합정책으로 이웃 익산(군)과 합쳐 이름을 '익산'(시)으로 바꿨다. 땅덩어리는 여섯 배로 넓어지고 인구도 33만 명으로 10만 명이나 늘면서 전주에 이어 전북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가 됐다. 그리고 '이리'란 이름은 빠르게 잊혔다.
'이리'가 사라진 지 꼭 30년이 되는 올해, 먼지 잔뜩 쌓인 도시의 기억과 기록을 뒤져 그 속에서 숨겨져 있던 의미를 찾아내 정리한 책 <이리, 잊혀진 도시>가 출간됐다. 뜻깊은 일이다.
잊힌 도시, 이리를 다시 불러와야 하는 이유
책을 쓴 신귀백 익산근대문화연구소 소장은 "이리는 스스로 잊혀지는 길을 택했다"고 했다. 시와 군을 합치면서 사람도 돈도 더 많은 도시인 '시' 이름을 버리고 농·산·어촌인 '군' 이름을 쓰는 일은 흔치 않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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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리시-익산군 통합을 찬성하는 시위대의 모습 |
| ⓒ 익산시 |
그래서일까, '이리 사람들'에겐 아직도 옛 도시 이름이 애틋하게 불린다. 그렇다고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이 다는 아니다. 이 도시에 살았다는 건, 그러니까 '이리 사람'이라는 건 자부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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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년 처음 문을 연 이리역사의 모습 |
| ⓒ 익산시 |
만주와 일본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전재민들, 그리고 몇 년 뒤 한국전쟁으로 갈 곳 잃은 피난민들도 기찻길을 따라 이 도시에 스며들었고 이 도시는 또 한 번 그들을 따뜻하게 품었다. 이들 모두가 바로 이곳에 처음 뿌리를 내렸던 '이리 사람들'이고, 그 뒤로 수십 년에 걸쳐 이 도시를 번듯하게 키워낸 것도 바로 이들이었다. 그러니 '이리'는 쉽게 잊혀선 안 될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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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강점기 사진엽서에 담긴 이리역 앞 번화가 영정통 풍경 |
| ⓒ 익산시 |
하루가 다르게 일본인들이 모여들었고, 1912년 3월 역이 문을 열면서 역 남쪽으로 철도국 직원들이 살 집과 공동목욕탕, 병원이 들어섰다. 또 동쪽으로는 이리좌(극장)와 이리구락부(클럽), 일본인이 운영하는 상점과 요리점, 여관 등이 빠르게 늘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동양척식회사 이리지점과 은행 그리고 이리농림학교를 비롯한 학교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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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강점기 사진엽서에 담긴 옛 이리농림학교(전북대학교 특성화캠퍼스)의 모습. |
| ⓒ 익산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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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리장터와 맞붙어 있던 오하시의 대교농장 석벽 모습 |
| ⓒ 익산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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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강점기 이리농림학교 학생들의 모습 |
| ⓒ 익산시 |
"...농과 5학년 박중구를 중심으로 독서회 조직활동을 하다가, 1930년 2월 관련 학생들이 퇴학당하였다... 이리농림학교의 항일투쟁비밀조직인 화랑회사건이 1945년 4월에 적발되어 농과 4학년 이상운 등 8명과 항일투쟁으로 퇴학당한 독립당원 5명 등 13명이 구속되어 모진 고문과 시련을 당했다." - <이리, 잊혀진 도시> '7장. 교육도시 이리의 까마귀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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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년 열린 이리수출자유지역 기공식의 모습 |
| ⓒ 익산시 |
1960년대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면서는 이리에도 산업화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국제전광사, 은성고무, 쌍방울, 삼양식품, 보배소주 등의 기업 또는 공장들이 잇따라 이리에 설립되었다. 1970년대엔 이리가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되면서 또 한 번 성장의 동력을 얻게 되는데, 귀금속과 섬유산업이 특화산업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일제강점기 이리에 이리농림학교가 있었다면 1970년대엔 박정희 정부가 세운 전북기계공업고등학교가 있었다. '공업입국'을 앞세운 박정희 정부가 부산과 구미에 이어 이리에 세운 국립학교로 학비와 기숙사비를 모두 나라에서 댔다. 형편이 어려운 전국 상위 10%의 수재들이 치열한 경쟁을 거쳐 들어갔다고 한다. 산업화의 그늘도 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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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리역 폭발 사고로 파괴된 철길의 모습 |
| ⓒ 익산시 |
역 앞 중앙동은 현대식 상가 밀집 지역으로 탈바꿈했고, 비만 오면 더러운 물이 차오르던 이리역굴다리 대신 번듯한 지하도로가 새로 철길 밑을 가로질러 도시의 동서를 이어줬다. 또 폭발로 허름한 판잣집들이 무너진 역 북쪽과 서쪽에는 빠르게 아파트단지가 올라갔는데, 모현아파트는 재건축을 거쳐 새 단장을 했고 창인아파트는 50년 가까이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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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강점기에 현대식으로 신축한 이리역 대합실의 모습 |
| ⓒ 익산시 |
'이리'는 갈대숲 너머(속) 숨어 있는 마을을 가리키던 '솝리'(속마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솝'은 '속'의 옛말이고, '속마을'을 한자어로 그대로 옮긴 게 '이리(裡里)'다. 이제 이리는 우리들 마음과 기억 속에 남은 마을이 되었다. 앞으로도 오래도록 그럴 수 있을까.
신귀백 소장은 책을 맺으면서 "익산이라는 멋진 도시에 그 관문인 기차역만큼은 이리역이라 해도 좋았을 것"이라고 적었다. 일본이 규슈에서 가장 큰 도시인 '후쿠오카'와, 규슈와 본토를 잇는 기차역이 자리한 도시 '하카타'를 합치면서 새 도시 이름은 후쿠오카로 하되 규슈로 들어서는 관문인 기차역은 그대로 하카타역으로 두었던 것처럼 말이다. 곱씹어 볼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리, 잊혀진 도시> 저자 신귀백은 익산근대문화연구소 소장이다. 전남 나주 출생으로 부모님을 따라 이리로 이주해 학창시절을 보내고 목포와 정읍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영화사용법>이란 영화평론집을 내고,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미안해 전해줘>의 감독을 했다. 인문서 <전주편애>와 <이리역의 까마귀떼>도 펴냈다. '일제강점기 이리 관련 일본인 저작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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