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산불 한달]①사람이 원인되고, 바람이 키웠다
편집자주
의성발 경북 산불(의성산불)이 발생한 지 한 달째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지만, 화마가 지나간 자리에 상흔은 여전히 남았다. 의성산불은 과거에 역대 최악의 산불로 불리던 2000년 동해안 산불 기록도 갈아치웠다. 그만큼 소실된 산림 면적이 넓고, 인명·시설 피해 역시 컸다. 한 번 망가진 자연을 원상복구 하는 데 필요한 시간도 그렇거니와 화마를 경험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상흔도 쉽게 치유되지 않을 터다. 제2, 제3의 의성 산불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최근 대형 산불의 특징과 원인, 산불 재난을 마주한 산림당국이 풀어가야 할 과제 등을 짚어본다.
"사람이 원인을 제공하고, 바람이 화마(火魔)를 키웠습니다." 최근 경북지역을 휩쓸고 지나간 의성산불을 두고 나오는 말이다.
지난 15일 경북 의성·안동 일대 산불 피해 현장을 찾았다. 산불이 최초 발생한 것은 지난달 22일. 이미 한 달 가까운 시일이 지난 시점에 현장을 찾았지만, 곳곳에서 여전히 화마의 흔적이 남았다.
의성군 초입부터 숯처럼 검게 그을린 산들이 먼발치서 확연하게 눈에 띄었다. 녹음으로 채워져야 할 4월 중순의 산림은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나무들로 즐비해 속살이 훤히 드러났다. 나무가 있음에도 비어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불길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나무도, 마치 병든 것처럼 나뭇잎이 갈변해 멀쩡한 나무와 층층이 구별됐다.
특정 어느 지점, 어쩌다 한 두 곳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차량으로 의성과 안성 지역을 오가는 동안 온전한 산을 찾기가 어려웠다. 화마가 이 일대 산림을 모두 훑고 지나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날 내린 비의 영향으로 화재 현장 특유의 매캐한 냄새도 강했다. 차량으로 의성군과 안동시를 오가는 사이 창문을 열어두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 와중에 마을 주민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불길을 피해 인근 대피소로 거처를 옮겼던 주민들이 속속 집으로 돌아와 주변을 정비하는 데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목에 수건을 두른 채 허리를 숙여 화재 속 잔해를 정리하는 주민, 무너진 주택을 망연자실 바라보는 주민,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 나누는 주민들이 이곳저곳에서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희미하게나마 웃음기를 찾기도 어려웠다. 대부분 주민의 낯빛은 어두웠고, 근심에 차 보였다.
산중 깊숙한 곳을 들여다봤을 때도 산불 피해는 참담했다. 먼발치서 내다보던 숲의 내부는 온통 불길에 그을려 있었다. 대부분 나무가 불길에 휩싸여 기둥만을 남긴 상태로, 숲에서 생명력을 느끼기 어려웠다. 개중에는 허리춤이 부러진 나무도 여럿 눈에 띄었다. 고온의 불길에 약해진 나무들이 강풍으로 꺾인 것으로 추측된다.
토양도 본래의 성질을 잃었다. 흙빛은 온데간데없고, 땅을 밟았을 때 단단하게 뭉쳐진 토양에 반들반들해진 표면의 질감이 여과 없이 전달됐다. 과연 '이곳에서 다시 생명이 자랄 수 있을까'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통상 산불로 잿더미가 된 산림을 다시 원상복구 하는 데 소요되는 기간은 40년에서 100년이며, 이 기간 막대한 노력과 비용이 투자돼야 한다는 산림 분야 전문가들의 이야기가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의성 산불은 지난달 22일 오전 11시 경북 의성군 안평면 괴산리에서 최초 발화해 안성·영양·영덕·청송 등 인근 5개 시·군으로 확산했다. 의성에서 시작해 경북 일대로 불길이 확산한 데는 바람의 영향이 컸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산림청과 기상청에 따르면 지난달 21~26일 전국 평균기온은 14.2도로, 평년(1991~2020년)보다 6.4도 높았다. 이는 3월 중순을 기준으로 역대 가장 높은 기온으로 기록된다. 같은 기간 경상권의 최근 4개월간 누적 강수량은 평년 대비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특히 산불 확산의 주된 원인으로 지목된 바람의 세기는 25m/s를 넘나든 것으로 확인된다. 실제 안동 하회마을은 최대 순간풍속 27.6m/s, 의성 옥산면은 최대 순간풍속 21.9m/s, 의성 단북면은 20.4m/s를 기록했다, 이는 1997년 이래 3월 일별 최대 순간풍속 중 가장 강했던 바람이다.
의성에서 만난 남부지방산림청 이석원 산림보호팀 팀장은 "현장에서는 의성 산불이 사람 손끝에서 발생하고, 바람에 의해 커진 전형적인 대형 산불로 보는 시각이 많다"며 "산불은 대개 풍향·풍속·지형 등에 따라 진행 방향과 규모를 예측할 수 있는데, 의성 산불은 기존 산불 경험을 백지화할 만큼 예측불허의 상황을 만들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또 "하루, 이틀 안에 진화될 줄 알았던 산불이 대형 산불로 번져 역대 가장 큰 피해를 야기했다는 점에서 현장에서 느낀 무력감과 당혹감도 컸다"며 "피해가 큰 만큼 산불을 모두 진화한 시점에도 현장에선 서로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건네는 것이 어려웠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의성 산불 피해는 비단 산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지난달 22~28일 경북지역에서만 산불로 27명이 사망하고, 40명이 중·경상을 입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흔도 깊다. 대형 산불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지역 주민들에게 산불은 한동안 치유되지 않을 심리적 상처를 남겼다.
의성군 신월리에서 만난 이복희씨(70·여)는 "방송에서나 봤던 큰불을 내 집 앞마당에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큰불에 당황해 허둥지둥하는 사이에 경찰이 찾아와 대피를 도운 덕분에 그나마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씨는 "산불을 피해 임시 거처로 몸을 옮겼다가 집에 돌아오니 사랑채가 전소되고, 귀촌한 아들이 머무르던 주택 한 채도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져 있었다"며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지만, 작은 불씨만 봐도 놀라게 되는 등 당시의 두려움이 당분간 트라우마로 남게 될 것 같다"고 허탈해했다.
의성군 구계2리 이장 류시국씨(63)도 마을에서 인명피해가 발생하지 않은 것은 천운이라고 말했다. 류씨는 "지역에서 다수 사망자와 부상자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이 철렁했다"며 "그나마 마을에서 인명피해가 발생하지 않은 것을 '천운'이라 여기며, 감사할 따름"이라고 심경을 전했다.
다만 마을에는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했다. 구계2리는 40여 채의 주택에서 60여 명의 주민이 생활하는 작은 마을이다. 하지만 지난 의성산불로 주택 30여 채가 소실되면서,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었다.
류씨는 "집을 잃은 주민 다수가 여전히 마을로 돌아오지 못하고, 자녀 집이나 인근 모텔 등에서 임시 생활하는 중"이라며 "고령의 마을 주민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이전의 삶을 되찾는 데는 아마도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전=정일웅 기자 jiw306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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