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운 순간을 선사하는 뉴욕 호텔

윤정훈 2025. 4. 21.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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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비크먼 어 톰슨 호텔'에서 만난 박제된 아름다움.
배재희
숍 ‘아사시’ 디렉터 겸 버벌리스트. 사물 또는 브랜드 이면의 숨은 이야기를 발견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닿을 수 있도록 브랜드의 언어를 완성한다.

더 비크먼 ‘도시를 걷는다’. 이 단순한 문장이 떠올리게 하는 풍경은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자신이 사는 도시를, 어떤 이는 여행했던 도시를 떠올릴 수 있지만, 나는 이 단어에서 뉴욕을 본다. 세계에서 마천루가 가장 많은 도시. 몇백 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쌓여 있는 도시.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이 뒤엉켜 길게 뻗은 도로. 늘 어딘가 공사 중인 건물들. 뉴욕의 인도를 걷다 보면 공사로부터 보행자를 보호하기 위한 가림막과 자주 마주친다. 설치물로 좁아진 길을 걷다 보면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어깨가 스칠 듯 지나간다. 문득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은 대부분 무표정이고, 빠르게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것 같지만 동시에 뭔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뉴욕을 상징하는 작가 폴 오스터는 〈유리의 도시〉에서 이렇게 썼다. “뉴욕은 무진장한 공간, 끝없이 걸을 수 있는 미궁이었다. 아무리 먼 곳까지 걸어도, 근처에 있는 구역과 거리를 아무리 잘 알게 되어도, 그 도시는 언제나 그에게 길을 잃고 있다는 느낌을 안겨주었다.” 그의 말처럼 뉴욕은 적극적으로 길을 잃기에 가장 적합한 도시고, 여행자에게는 길을 잃는 것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또 다른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미로 같은 도시에서 하나의 린치핀(linchpin)이 필요했다. 로어 맨해튼. 브루클린 브리지로 이어지는 맨해튼의 남쪽. 뉴욕 시청과 뉴욕 증권거래소, 월 스트리트가 있는 도시의 심장부. 이곳에 내가 머문 ‘더 비크먼 어 톰슨 호텔(The Beekman, A Thompson Hotel)’이 있다. 비크먼 거리는 뉴욕 초기의 역사를 품은 건물이 줄지어 있는 곳이다. 이 골목 모퉁이에 첨탑이 솟은 빨간 벽돌 건물이 있다. 내가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한 호텔이 아니라, 시간이 겹겹이 쌓인 장소이기 때문이다.

비크먼 거리의 이야기는 176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최초로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초연된 곳, 에드거 앨런 포와 랠프 월도 에머슨 같은 문인들이 드나들었던 장소. 그리고 1881년 뉴욕 최초의 9층짜리 고층 건물로 태어나 법률가들의 사무실이 됐다가, 2016년에 레너베이션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발끝에 오래된 역사가 채이는 듯한 거리에서 문을 열고 호텔로 들어서면 마치 과거에 들어선 기분이 든다. 이 신비로운 느낌은 비크먼 호텔의 상징인 아트리움 덕분이다. 아트리움은 고대 로마 건축에서 유래한 ‘실내 중정’을 의미한다. 비크먼의 아트리움은 도넛처럼 가운데가 뚫린 9층 높이의 공간으로, 유리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으로 가득하다. 빛은 층마다 섬세하게 조각된 철제 난간과 규칙적으로 배열된 200여 개의 방을 비추며, 공간을 하나의 거대한 만화경처럼 보이게 한다. 1층에서 위를 바라보며 문득 궁금해졌다. 수직으로 뻗은 시야가 이렇게 극적이라면 9층에서 내려다보는 건 어떨까? 한 투숙자는 그곳에서 뉴욕의 심장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고 했지만, 나는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주인공이 시간을 초월해 시공간의 틈새를 바라보던 그 순간처럼 과거와 현재가 중첩되는 아찔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해가 저물면 이곳의 분위기는 달라진다. ‘재즈 시대’로 불리던 1920년대 F. 스콧 피츠제럴드가 그린 황금빛 뉴욕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호텔 지하의 템플 코트 바에 들어서면 먼저 에드거 앨런 포의 초상화가 시선을 붙잡고, 벽면 책장은 오래된 양서들로 빼곡하다. 원형 테이블 몇 개만 놓인 라운지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은밀한 대화로 끌어들인다. 이언 플레밍, 하퍼 리 같은 작가들의 이름을 딴 칵테일을 손에 들고 있자니 왠지 100년 전 사람처럼 삶에 대한 그럴싸한 것들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았다. 팬시한 뉴요커들을 구경하다 자연스럽게 호텔 인테리어에 눈길이 갔다. 빈티지 그린 컬러의 벽과 부드러운 벨벳 소파가 만드는 분위기는 과거를 세련되게 재현하고 있었다. 이렇게 들뜬 밤을 보내고 돌아온 객실은 아늑하게 나를 맞아주었다. 뉴욕 호텔치고 꽤 넓은 편이며, 미국의 소울 랄프 로렌의 홈이 연상된다. 새하얀 침구와 수직 줄무늬의 우드 벽, 특이한 손잡이가 달린 나무 옷장, 가죽 헤드보드가 멋스럽다. 특히 침대 옆에는 동양적 무드를 풍기는 터쿠아즈 블루 도자기 램프가 놓여 있는데, 비크먼 호텔의 문양이 양각된 걸 보니 별주된 제품인 것 같았다. 선명한 이 컬러 하나가 빈티지 공간에 현대적 감각을 불어넣는다.

다음날 아침, 보라색 1인용 소파가 놓인 창가에서 바깥 풍경을 봤다. 뉴욕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들과 초록색 첨탑을 가진 금빛의 울워스 건물이 보였다. 간단한 룸서비스를 시키고 객실 문을 열었을 때, 투명한 비닐에 담긴 〈뉴욕 타임스〉가 문고리에 걸려 있었다. 활자와 사진이 담긴 오늘의 헤드라인을 보는 순간 현실이 다가왔다. 바깥은 여전히 소란스럽고, 사람들은 바삐 걸어 다니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무표정한 얼굴로,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말이다. 나는 문을 닫고 다시 창문 가의 소파로 돌아와 커피를 마시며 〈뉴욕 타임스〉를 뒤적이며 창가 풍경을 봤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뉴욕의 영화로운 순간과 호텔에 박제된 과거의 아름다움. 그날은 도시를 걷지 않고 호텔에서 오래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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