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필’이 세계 정상 지키는 이유? 和音 위한 ‘절제’의 합주력

김윤덕 기자 2025. 4. 21.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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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덕이 만난 사람]
창립 30년, 한국 클래식 공연계 ‘큰 손’ 이창주 빈체로 대표
한국 클래식 공연계의 '큰 손' 이창주 빈체로 대표가 그간 기획해온 대표적 공연 포스터 앞에서 활짝 웃었다. 가회동 단칸방에서 직원 1명과 클래식 공연 기획을 시작한 그는 한국 현대 음악사의 산증인이다./ 고운호 기자

‘빈체로’는 국내 클래식 공연계 터줏대감이다. 한국에 베를린 필, 런던 심포니,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같은 세계 최정상 오케스트라를 초청하려면 빈체로 이창주 대표가 움직여야 한다. 올해만 해도 키릴 페트렌코가 이끄는 베를린 필, 클라우스 메켈레가 지휘하는 파리 오케스트라, 에드워드 가드너의 런던 필이 내한해 김선욱, 임윤찬, 손열음과 협연한다. IMF, 글로벌 금융 위기, 코로나 풍랑 속에도 30년 클래식 외길을 걸어온 이창주는 “정치하는 분 중에 클래식 애호가가 많던데, ‘베를린 필’이 왜 변함없이 세계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곱씹어보면 좋겠다”고 했다.

◇ 정치도 음악처럼

-클래식계에 계엄, 탄핵 영향은 없었나.

“코로나 때 비하면 미미했다. 오히려 음악으로 위로받은 분들이 많다고 한다.”

-지난 연말 임윤찬과 파보 예르비의 도이치 캄머필 협연은 정치 파행에도 대성공을 거뒀다.

“예매 시작 5분도 안 돼 모든 티켓이 동이 났다. 조성진과 사이먼 래틀의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협연에 이은 블록버스터급 흥행이었다.”

-올해 첫 공연이었던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 연주도 화제였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연주한 김선욱의 카리스마가 대단하더라.

“세계적인 작곡가 진은숙씨가 객석에 앉아 있다가 기립 박수를 쳤다(웃음). 베토벤에 강한 김선욱이 지휘까지 하면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어서 더 화제가 됐다.”

-베토벤이어서 더 감동적이었을까?

“아무래도 헌재 선고가 난 직후라. 음악엔 확실히 치유의 힘이 있다.”

-정치인들 중에도 클래식 애호가가 많다던데.

“세계 최고 명문 악단인 베를린 필은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이 1급 솔리스트다. 그러나 교향곡이나 대규모 관현악곡을 연주할 땐 혼연일체가 되어 강력한 합주력을 자랑한다. 전체의 하모니를 위해 자기를 절제하고 다른 연주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정치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어디든 명지휘자가 있어야 가능한 일.

“물론이다.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은 ‘나를 따르라’ 식의 독재자 스타일로 베를린 필을 강력하게 만들었다면 클라우디오 아바도, 사이먼 래틀은 단원 친화적인 스타일이었다. 과거엔 독재자 스타일이 먹혔다면 요즘엔 단원 개개인의 장점을 존중하면서 하모니를 이끌어내는 ‘형님 리더십’이 더 인정받는 것 같다(웃음).”

지난 4월7~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베토벤 피아노협주곡을 연주하고 있는 김선욱과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 김선욱은 지휘도 하며 피아노를 연주해 화제가 됐다. /빈체로 제공

◇ 한국 클래식의 힘, 청중!

-빈체로는 리사이틀(독주회)보다 오케스트라 공연에 강한 기획사라고 들었다.

“베를린 필, 시카고 심포니 등 유럽과 미국의 메이저 오케스트라 10개 중 7~8개가 우리와 일한다. 30년 전 우리의 첫 메이저 오케스트라 공연도 뮌헨 필하모닉이었다. 뭣보다 내가 대형 오케스트라 공연을 좋아한다(웃음).”

-가회동 단칸방에서 직원 1명과 시작한 작은 기획사가 세계 정상급 악단들을 사로잡은 비결이 뭘까?

“첫째도, 둘째도 신뢰였다. 30년 전 뭣 모르고 시작할 때는 일본 공연 기획사들에서 많이 배웠다. 일본 공연을 위해 아시아에 온 악단들이 변방인 한국에도 들렀다 갈 수 있도록 갖은 방법을 모색했다.”

-어떤 노력을 기울였길래.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이를테면 일본에서보다 더 좋은 숙소에 묵게 하고, 아침밥도 제공했다. 공연 후에는 파티도 열어줬다(웃음).”

-일본에선 그렇게 안 하나?

“공연으로 끝이다. 당시엔 맥주 한 캔도 안 줬다(웃음). 그만큼 일본 클래식 시장이 크고 중요하다는 방증이다. 우리의 열 배다.”

-지금은 한국 시장도 중요해졌을 텐데.

“한국 클래식 시장이 커진 데다 K컬처가 강해져 악단들이 서로 오고 싶어 한다. 요즘은 식사도 불고기 같은 한식으로 요구한다. 근데 한국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뭘까?

“뜨겁게 반응하는 청중. ‘브라보!’를 아낌없이 외치고 커튼콜까지 적극적으로 하는 관객의 열띤 호응에 요즘은 아시아 투어 중 한국이 가장 중요한 무대로 자리 잡았다. 뮌헨 필,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처럼 한국만 단독으로 오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한국엔 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가 없을까?

“솔리스트 중심의 교육 때문이다. 모두가 콩쿠르를 향해 달려가다 보니 협업 중심의 오케스트라나 실내악 경험이 부족하다. 또 명문 악단이 나오려면 교육 시스템, 재정 지원, 상주 공연장 같은 인프라가 갖춰져야 한다. 지휘자도 중요하다. 베를린 필은 카라얀이 34년을 이끌며 최고의 명문 악단으로 성장시켰다. 서울 시향 역시 정명훈이 이끈 10년 동안 세계적 수준으로 도약했다. 예술을 융성하게 만들 행정이 절실하다.”

‘반 고흐에서 피카소까지’전시회를 찾은 피아니스트 백건우(왼쪽)·윤정희 부부가 클로드 모네의 ‘빨간 스카프를 두른 모네 부인의 초상’ 앞에서 즐거워하는 모습. /조선일보DB

◇ 백건우, 윤정희의 품격

-10대의 조성진을 글로벌 무대에 데뷔시킨 은인이더라.

“2008년 가을, 서울대 신수정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괴물’이 하나 나왔는데 보겠냐고 하더라. 베토벤 소나타 7번을 연주하는 열네 살 성진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우선 루체른 페스티벌 스트링스, 뮌헨 필 협연을 성사시켰다. 마렉 야놉스키가 이끄는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을 통해 독일 무대에도 전격 데뷔했다.”

-정작 조성진의 ‘쇼팽 콩쿠르’ 우승 덕은 못 봤다던데.

“쇼팽 콩쿠르서 우승하자 성진이를 데려가려고 백지수표를 내미는 기획사도 있을 만큼 경쟁이 치열해서 우리는 빠지기로 했다. 그런데 성진이가 전화를 했더라. ‘저 콩쿠르 된 거 아시죠?’ 하면서(웃음). 그래도 4년 뒤 이반 피셔의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협연을 시작으로 런던 심포니, 베를린 필까지 계속해서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요즘 한국 클래식은 조성진, 임윤찬이 양분한 모양새다.

“성진과 윤찬은 한국 클래식 위상을 드높인 주역이지만 두 사람에게만 과도하게 관심이 쏠리는 현상은 장기적으로 볼 때 건강하지 않다. 바이올린·비올라·트럼펫 등 다양한 악기, 또 여러 세대에 걸쳐 뛰어난 연주자들이 많은데 골고루 폭넓게 조명 받았으면 좋겠다.”

-피아니스트 백건우와도 각별하더라.

“‘구도자’라는 별명이 딱 맞는 진짜 음악가다. 음악밖에 모르는 분이라, 집안일로 어려움 겪으실 때 내 일처럼 대응해 드렸다.”

-아내인 윤정희 배우도 자주 만났겠다.

“처음 윤정희 선생을 뵀을 때 ‘저는 피아니스트 백건우 매니저입니다’라고 소개하더라. 지방 공연을 가면 영화계 인사들이 윤 선생과 미팅을 요청했는데 정중히 거절하셨다. 백건우 매니저로 온 거지 배우로 온 게 아니라면서. 리허설부터 무대 뒤 심부름까지 그림자처럼 따르던 모습, 손에 묵주를 쥐고 객석 맨 뒤에 앉아 계시던 모습이 선하다.”

-해외 음악가 중엔 누가 제일 기억에 남나?

“안너 빌스마. 첼로 연주자에겐 첼로가 앉을 자리까지 비행기표를 2장 끊어드리는데 이분은 비즈니스석을 마다하고 늘 이코노미석으로 부탁했다. 그 돈을 절약해 공연을 한 번 더 하자며. 한번은 호텔 방에서 불을 끄고 첼로 연습을 하기에 놀라서 물으니 악보를 다 외우는데 왜 에너지를 낭비하느냐고 하더라(웃음).”

-첼로 거장 미샤 마이스키는 연주료를 깎아준 적이 있다던데.

“IMF 사태로 공연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연주료는 낮춰도 되니 공연은 꼭 하자고 하더라. 연주료가 정찰제가 아니란 걸 그때 처음 알았다, 하하!”

이창주 빈체로 대표의 어머니는 90세까지 어린이 교육에 헌신한 김득실 원장이다. 사진은 생전의 김 원장이 서울 상계동 백운유치원에서 유치원 5세반 아이들과 함께 찍은 모습. /조선일보DB

◇ 아버지가 부르던 가곡 ‘그네’

-회사 이름이 왜 ‘빈체로(Vincero)’인가?

“1990년 로마 월드컵 전야제에서 스리 테너가 공연할 때 현장에 있었다. 파바로티가 오페라 투란도트의 아리아를 부르며 ‘빈체로, 빈체로(승리하리라)’를 열창할 때, 언젠가 내 회사를 가지면 빈체로로 이름 지으리라 마음먹었다.”

-아버지가 성악가였다고?

“가업을 잇느라 꿈은 이루지 못하셨다. 대신 어릴 때부터 집안에 음악이 흘러넘쳤다.”

-90세까지 초등학교 교사, 유치원 원장으로 일해 화제가 된 김득실 선생이 어머니시다.

“‘스승의 날’이면 찾아오는 제자들이 정말 많았다. 학생이든 자식이든 스스로 잘할 수 있는 걸 찾을 때까지 기다려주셨다. 공부하라는 잔소리 대신 ‘이건 어떨까?’ 하며 아이디어를 주신 분이다.”

-어머니도 클래식을 좋아했나?

“아버지가 부르는 가곡을 좋아하셨다. ‘그네’라는 곡을 특히.”

-빈체로 30년 동안 클래식 환경도 많이 변했을 텐데.

“클래식이 부자의 전유물에서 벗어난 점! 특히 젊은 관객의 티켓 파워가 세졌다. MZ세대는 자기가 좋아하는 연주자나 악단이 오면 삼사십만원 로열석도 거침없이 구매한다. 남성 관객도 많아졌다.”

-요즘은 유튜브로 공연을 보는 사람도 많은데.

“F1 경기를 보러 가는 건 자동차의 우렁찬 엔진 소리가 심장을 때리는 듯한 희열을 느끼기 위해서다. 유튜브는 현장에서 느끼는 감동에 20%도 못 미칠 것이다.”

-얼마 전 부산콘서트홀이 완공돼 화제였다.

“더 많은 공연장이 있어야 한다. 서울 롯데콘서트홀이 10년 됐는데 세계적인 지휘자들이 꼭 한번 연주해보고 싶은 공연장으로 꼽는다. 지휘자에게 공연장은 악기와 같아서다. 부산콘서트홀에 이어 삼성이 클래식 전용 콘서트홀, 현대차가 오페라·발레를 포함한 다목적 클래식홀 건립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들려와 무척 반갑다.”

-엉뚱한 질문 하나. 오케스트라에 중요한 악기, 덜 중요한 악기가 있을까?

“베토벤 교향곡 9번에서 트라이앵글과 심벌즈는 4악장에서 잠깐 등장한다. 말러 교향곡 6번은 ‘운명의 해머’라고 해서 특수 제작된 나무 망치가 4악장에서 짧게 연주하고 사라진다. 그렇다고 해서 덜 중요할까? 짧지만 극적으로 등장해 화룡점정을 찍는 악기도 있어야 비로소 음악은 완성된다. 우리 인생처럼(웃음).”

-상심한 이들에 위안이 될 한 곡.

“바흐의 ‘예수, 인류의 소망과 기쁨’. 맑고 따스한 선율이 슬픔과 걱정을 잠시 내려놓게 해준다. 합창곡이지만 피아노 편곡도 아름답다.”

예술의전당 근처에 자리한 클래식 공연 기획사 빈체로에서 이창주 대표를 만났다. 그는 한국 클래식의 힘은 연주자와 오케스트라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청중에게서 나온다고 했다. / 고운호 기자

☞이창주

1954년 서울 출생. 경기고, 한국외국어대 독어교육과를 졸업한 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호텔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스포츠 마케팅 회사를 운영하다 귀국해 1995년 클래식 공연 기획사 ‘빈체로’를 설립했다. 뮌헨 필 오케스트라를 시작으로 베를린 필하모닉, 런던 심포니 등 세계 명문 악단과 국내외 정상급 연주자들의 공연을 수백 회 기획했다. 한국공연예술경영협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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