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때 부르면 안되는 명단을 건넨 아버지…“슬퍼할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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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역 대합실 풍경을 떠올려보자.
실제로 아버지는 "생전 몇 명 이름을 얘기하며 '내 장례 때 부르지 말라'고 당부하신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사람들은 내가 죽었을 때 슬퍼할 것 같다'는 게 이유였다.
말하자면 블랙리스트는 남겨질 사람들에 대한 아버지 나름의 마중이자 배웅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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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사람들 감정 먼저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마중과 배웅’
‘마중은 기다림을 먼저 끝내기 위해 하는 것이고 배웅은 기다림을 이르게 시작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가 마주하는 순간과 돌아서는 순간이 엇비슷해진다.’(산문 ‘생일과 기일이 너무 가깝다’에서)
7년 만에 새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창비)를 낸 박 시인을 14일 서울 마포구 창비 사옥에서 만났다. 마중과 배웅에서 시인은 누굴 떠올렸을까. 어쩌면 수록 시 ‘블랙리스트’가 힌트가 될 것 같다.
‘몇해 전 아버지는 자신의 장례에 절대 부르지 말아야 할 지인의 목록을 미리 적어 나에게 건넨 일이 있었다. (…) 빈소 입구에서부터 울음을 터뜨리며 방명록을 쓰던 이들의 이름이 대부분 그 목록에 적혀 있었다’.
실제로 아버지는 “생전 몇 명 이름을 얘기하며 ‘내 장례 때 부르지 말라’고 당부하신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사람들은 내가 죽었을 때 슬퍼할 것 같다’는 게 이유였다. “청승맞은 소리 마시라고 앞에선 타박했지만, 멋지단 생각도 들었다”고 시인은 회고했다.
“타인의 감정을 먼저 한 번쯤 생각하는 게 시인의 태도랑 비슷한 것 같아서요. 내가 죽었을 때 무슨 생각으로 올까, 내가 어떤 말을 했을 때 어떤 감정을 가질까 이게 연결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말하자면 블랙리스트는 남겨질 사람들에 대한 아버지 나름의 마중이자 배웅이었던 셈이다. 시인의 아버지는 지난해 봄 세상을 떠났다.
“미리 생각해서 마중 나가고 혹은 가는 거 알면서도 조금 더 앉아서 배웅하고. 이게 가장 인간다운 시간이고, 인간다운 시간에서 인간다운 정서가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평생 마중하고 배웅한 관계지만, 정작 영원한 이별 앞에선 마중도 배웅도 미진하다. 시집에는 그런 이별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차마 얘기하지 못하는 더 많은 죽음들이 있어요. 욕심 같아선 한 권을 다 장례식으로 채우고 싶었어요. 검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전혀 마르지 않는. 근데 마지막에 이를 악물었어요. ‘이건 독자들에게 너무 폐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떤 뜨거운 재료도 읽는 이들을 위해 호호 불어 내놓자는 게 박 시인의 태도다.
“시인이 되길 참 잘했다고 생각하는 게, 시는 샤우팅하지 않잖아요. 물론 나는 내적으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것이지만 이 소리가 타인의 귀를 찌르지 않는다는 거죠. 내 목청을 뚫고 찌르고 나온 것이지만 타인을 훼손하거나 방해하지 않아요.”
그런 그에게 작은 바람이 있다면, 세상이 조금은 시의 화법을 닮아갔으면 싶다.
“김치 먹을 때 ‘대 좋아해 이파리 좋아해?’ 이런 것은 정보의 대화가 아니라 정서의 대화죠. 상대가 대를 좋아한다고 미워하지 않죠. ‘난 이파리를 좋아하는데 저 별종은 왜 대를 지지할까’ 생각하지 않잖아요. 긍정적인 인간의 대화는 시에 가까워요. 만약 우리가 여전히 시를 읽어야 한다면 시의 화법이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도인 같다’고 하자, 박 시인은 손사래를 치며 “나도 무슨 선비나 신선처럼 ‘허허’ 하는 정서의 대화만 하고 사는 건 아니다”고 했다.
“일상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날 선 대화, 정보의 대화가 오가는데 이런 완충이 있어야 다시 또 돌직구를 날릴 수 있죠. 상처가 그냥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요? 시간이 지나면 피멍이 들죠. 그냥 그 위로 다른 말들이 쌓여야 하는 것 같아요. 연고처럼.”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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