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뛰놀고 의대생 봉사까지... 이런 교회 또 없습니다 [정진동 평전]
정진동을 아십니까. 농촌선교(1958~1971)에서 도시산업선교(1971~2004) 활동까지, 정진동은 충북 지역 민주화운동의 어른이었습니다. 정진동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가 꿈꿨던 공동체 사회,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 민중해방의 사상을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2005년 정진동이 쓰러지면서 청주도시산업선교회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모색해야 했다. 하나의 집 조지송 목사가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전체 교인들 앞에서 무거운 입을 열었다. "이 교회를 파세요"라고.
청주산선 매각을 제안하다
조지송은 교회를 팔아 그 일부를 정진동 목사 치료비로 충당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30여 년간 청주산선 활동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도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교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정진동이 쓰러지기 전인 1990년대에도 청주도시산업선교회의 사회적 위상은 변화했다. 청주산선은 일반적인 선교 활동을 하는 교회라기보다는 도시산업선교, 민중 선교를 하는 사회운동단체였다.
그런데 1987년 민주화 투쟁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 전 영역의 민주화가 촉진됐다. 특히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 전농(전국농민회총연맹)이 출범하면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충북 지역에서는 1980년대 말부터 1990년 초반에는 청주시민회, 청주경실련(청주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청주환경운동연합 등이 출범하면서 본격적인 시민운동 시대가 도래했다. 결국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청주산선의 입지는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시민사회 발전의 자연스러운 경로였다.
그런 상황에서 정진동은 청주산선의 활동 영역을 충북역실협(충북역사정의실천협의회)을 통한 역사정의운동, 통일운동, 주민운동으로 전환했다. 이런 상황에서 2005년 1월 1일 뇌졸증으로 쓰러졌다. 다시 이전의 활동을 수행하기는 불가능했다. 이런 연유로 조지송은 청주산선의 활동 영역의 조정과 정진동의 입원비 등의 이유로 청주산선의 매각을 이야기한 것이다.
목욕탕에서 들은 말
하지만 청주산선의 매각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2년여 만인 2007년에 매각됐다. 새로운 보금자리는 기존 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의 일반 주택가로 정했다. 2007년 봄 새로운 보금자리로 이사하기 전 조순형은 동네 목욕탕을 찾았다.
"그동안 민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사실 사창동 청주산선은 청주지역 민주화운동의 요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하루가 멀다하고 노동자, 농민, 도시 서민들이 기도회와 농성을 벌였다. 경찰은 시위대와 대치한 중앙여고 정문에서 교회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쏴댔다. 최루탄이 교회로만 간 것이 아니라 근처 주택가에도 향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데모가 있는 날은 청주산선 인근 주민들도 눈물 콧물을 흘리는 날이었다.
더군다나 1988년 택시파업 때는 택시기사들이 청주산선에서 장기농성을 하면서 인근 주민들에게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쳤다. 야간에 음주를 한 이들이 때로는 고성을 지르며 동료들끼리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데 청주산선이 사창동에 입주한 1980년 12월부터 이사를 앞둔 2007년까지 26년 동안 주민들의 항의가 한 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조순형은 인근 주민들의 불만이 가득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이사를 앞두고 동네 목욕탕에서 만난 주민들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한 것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반응이 돌아왔다.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한 번도 교회를 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야기를 들은 조순형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동네 주민들이 청주산선을 이토록 애틋하게 생각할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사실 동네 주민들이 그렇게 이야기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청주산선이 노동·농민·도시빈민 문제에만 매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청주산선이 교회가 위치한 사창동과 청주시민 모두를 대상으로 한 '주민들과 꿈을 나누는' 운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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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내놀이 실내에서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 |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
어린이집은 가뭄에 콩나듯 하던 시절이었기에 대부분의 미취학 아동들은 방치되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맞벌이를 해야만 입에 풀칠할 수 있었던 서민들이 직장을 내팽개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 찰나에 청주시가 일정 공간만 있으면 돌봄 교사 2명을 파견해 '골목 유아원'을 운영한다니 엄마들 입장으로서는 대환영이었다.
문제는 공간이었다. 청주시가 공간을 확보하는 책임을 민간에게 떠넘겼기 때문이다. 청주산선이 서민들의 고통과 애환을 해결해주는 곳이라는 소문을 들은 주민들이 정진동을 찾은 이유다.
아줌마들의 이야기를 들은 정진동은 흔쾌히 동의했다. 그렇게 해서 청주산선 지하 20평(66.6㎡)이 '사창동 골목유아원'으로 변신했다. 1981년 3월 아동 38명으로 개원을 했다. 교사는 정광옥, 김계숙이 채용됐다. 정진동은 골목유아원을 개원하면서 일반적인 유아원처럼 운영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이들이 즐겁게 놀 수 있는 환경 조성과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정광옥과 김계숙은 정진동의 기대에 전적으로 부응했다. 매일 '보육일지'를 작성하고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에 머리를 싸맸다. 정광옥은 1년여 동안 '사창동 골목유아원'의 기틀을 마련하고 퇴사했다. 그 빈자리를 차재남이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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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업식 사창유아원 제3회 졸업식 |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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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풍 소풍 간 아이들 |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
봄·가을 소풍은 기본이고 매년 어린이날 기념행사를 진행했다. 아이들이 받는 용돈 중 일부를 저금하게 해 아이들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었다. 이른바 경제교육을 한 것이다. 이외에도 그림 그리기, 악기연주, 노래 부르기, 한글 교육, 학예 발표회를 통해 아이들이 다양한 경험을 하고 즐겁게 뛰어놀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일반 유치원에서 하는 프로그램 못지않게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정진동의 교육 철학과 전문성 있는 정광옥, 김계숙, 차재남, 박애경, 김홍미 교사들의 자질과 열정 덕분이었다.
1981년 5월 4일 '보육일지'에 의하면 아이들 간식으로 '빠다빵(버터빵)과 보리차'를 줬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청주시는 교사 인건비만 책임지고 운영비, 프로그램비, 간식비 일체를 지원하지 않았다. 그나마 인건비조차 1981년도에 2개월만 지원했을 뿐이다. 다행히도 1982년도에 KNCC 인권위원회 권호경 목사의 주선으로 독일에서 운영비를 지원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주교육지원청은 1984년도에 동네 골목유아원에 '무인가 교육기관 양성화 촉구' 공문을 내려보냈다. 학교 시설 설비 기준령에 근거해 시설과 교구를 갖추라는 것이다. 사실 교육청이 공문을 보낸 것은 1984년에 있었던 내덕동·운천동·송정동 주민싸움에 청주산선이 깊숙이 개입했기에 보복 차원에서 한 것이다.
학부모회장과 조순형은 청주교육지원청을 항의 방문했다. "우리는 그만두겠다. 대신 우리 아이들이 기존에 했던 것처럼(프로그램 등) 똑같이 운영해라." 청주시의 지원 실태를 잘 알고 있던 청주교육지원청은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청주시 지원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결국 1987년까지 운영한 '꿈나무 어린이동산'은 꿈을 접고 폐원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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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과 진료 접이 의자 두 개 위에서 치료받는 아이 |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재원이를 반갑게 맞이했다. 이내 진료 의자에 앉은 재원이는 긴장했다. 어른들도 치과 진료를 하면 긴장하게 마련이니 5세에 불과한 재원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입을 꾹 다문 재원이에게 의사가 "아~ 하세요"라고 했다.
"충치네요." "재원아. 앞으로 하루에 세 번 꼭 양치질 해야돼"라며 치아 모형에 양치질 방법을 시범을 보였다. 모든 진료가 끝나자 재원이 엄마가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사전에 진료가 무료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이대로 가도 되는지 몰라서다.
그러자 눈치를 챈 의사가 "얼릉 가세요"라고 했다. "이렇게 치료해 주셨는데, 그냥 가기 죄송해서유" 의사는 재원이 엄마의 등을 떠밀듯이 했다. 청원군 북일면(현재의 내수읍) 정하리 장재원(당시 5세)이 청주도시산업선교회에서 치과 진료를 받은 것은 1980년대 초반이었다.
청주도시산업선교회에서 치아 진료를 하게 된 계기는 1982년 서울대학교 치대생들이 교수들의 지도를 받아 행해진 여름방학 의료봉사였다. 당시 서울지역의 의대생들은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 의료봉사에 이어 청주산선에서도 의료봉사를 시작했다. 진료는 발치, 충치, 치석 치료였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여름방학 내내 진료 봉사를 한 학생은 김현덕(현재 서울대학교 교수), 김영희, 김형돈 등이었다.
1983년에는 정진동이 대전으로 가 치과 진료기기를 구입했다. 주민들에게 무료진료를 하는 마당에 보다 높은 진료서비스를 하기 위해서다. 19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의료보험(건강보험)이 전국민에게 실시되지 않아 치과 진료 비용은 무척 비쌌다. 그러다 보니 웬만큼 아파서는 병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양치질을 포함한 치아 관리도 엉망인 게 당시의 세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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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과기기 치과기기를 정리하고 있는 의대생 |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
청주산선 인근 주민들은 매년 여름과 겨울만 목타게 기다렸다. 방학 때만 치과 의료봉사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방학 중에 청주산선을 찾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자 1984년부터는 방학 중 봉사와 주말 봉사를 병행하기 시작했다.
1993년도부터는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 의대생들이 의료봉사의 배턴을 이어받았다. 의료 봉사에 참가한 의대생들이 노동현장에서 산업재해와 직업병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이후 사문화된 산재와 직업병이 근로복지공단에서 현실화되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 때 국민건강보험법이 시행이 되자 청주산선에서의 무료 치아 진료 활동은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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