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문서 태우고 땅도 나눠준 독립운동가... 그가 남긴 유언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적박단(赤雹團)이라는 항일운동단체가 있었다. 대담성의 첨단을 달린 조직이었다. 3·1운동 5년 뒤인 1924년 11월 9일 결성된 이 단체는 '조선 해방'과 '무계급 사회'를 강령으로 내세웠다. 그러면서, 이 강령에 위반되는 개인과 단체에 대한 무력 공격을 예고했다.
박(雹)은 '우박'도 의미하지만 '두들기다'도 의미한다. 그래서 적박은 '붉은 우박'으로도 풀이되고 '붉은 우박으로 두들기다'로도 풀이될 수 있다. 이처럼 도전적 이름을 내건 단체가 서울 한복판에서 활동했다. 사무실 위치까지 다 공개했다. 지금의 헌법재판소가 소재한 서울 종로구 재동에 버젓이 사무소를 내고 이를 언론에 알렸다. 불의한 개인이나 단체를 응징할 테니 언제든 신고해달라는 것이었다.
그해 12월 12일 자 <동아일보> 2면 우하단은 이 단체 회원이 40여 명이라면서"불미한 행동을 하는 자가 잇스면 그 사무소로 통지하여 주기를 바란다"는 당부를 전했다. 이 신문의 3년 뒤 8월 24일자 2면 중간에는 단원 숫자가 "수백"으로 적혀 있다.
국가보훈부의 <독립운동사> 제3권은 순종 황제 장례일을 기해 궐기한 1926년 6·10만세운동 직전의 긴박한 분위기를 설명하면서 적박단을 언급한다. 제2의 3·1운동을 우려한 일제가 서울 시내에 계엄을 선포해 놓고 6월 8일에 적박단 등을 압수수색 했다고 알려준다. 이처럼 일제가 경계하는 항일조직이었는데도 서울 한복판에서 대담하게 활동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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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금융사박물관에 있는 노비자매문서. 자신 또는 가족을 노비로 매매한다는 내용의 문서다. |
ⓒ 연합뉴스 |
14일 자 <동아일보> 2면 중간에 실린 적박단의 해명에 따르면, 좌파 활동가를 표방하는 북풍회의 서정희가 그해 중반에 격화된 전남 신안군 암태도 항일 소작쟁의 때 소작인들을 편들지 않고 지주 측을 편든 것이 위 공격의 주요 원인이 됐다.
적박단은 국제 활동도 했다. 중국공산당과 함께 국공합작을 이뤄 북방 군벌과 제국주의에 맞서는 중국국민당과도 협력을 모색했다. 이 때문에 허일이 톈진에서 국민당의 적인 북방 군벌에 체포되는 일도 있었다. 1927년 4월 9일자 <조선일보> 2면 우중간은 "(허일이) 지난 사월 초에 텬진에 잇는 중국국민당과 비밀 회견을 하다가 북군에게 톄포되엇다더라"라고 보도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힘을 빼놓았다. 1919년에 한국 3·1운동과 중국 5·4운동이 일어나고 이 시기에 일본 민주주의운동이 활발했던 것은 국가권력들의 일시적 약화로 인해 대중들의 에너지가 강했던 것과 무관치 않다. 일제 경찰이 적박단을 그냥 둘 수밖에 없었던 데는 이런 사정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수십 명을 동원해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직이었으니, 일제 경찰이 섣불리 다루기도 힘들었다.
적박단이 대담하게 활동한 배경이 제1차 대전 및 3·1운동 직후에 조성된 힘의 공백 상태와 관련이 있다는 점은 1927년에 안병희 등의 주도로 이 단체가 자진 해체된 데서도 느껴진다. 위의 1927년 8월 24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적박단은 "현하(現下) 조선사회 운동정세와 기타 모든 새로운 증후에 뎍응키 위하여" 해체를 결의했다.
그해 7월 25일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히로히토 일왕(천황)에게 제출한 '다나카 상주문'에서 "세계를 정복하고자 한다면 먼저 반드시 중국을 정복해야 합니다"라며 군국주의 정책을 본격화했다. 일본제국주의가 군국주의 성격을 가미하는 이 같은 전략적 변화는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 도발로 이어졌다.
적박단은 1927년 8월에 정세 변화를 명분으로 해체를 선택했다. 새로 조성되는 군국주의 정세하에서 종전처럼 대담한 활동을 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판단도 작용했으리라 볼 수 있다.
적박단은 그해 9월 3일 안병희의 경과 보고를 듣고 난 뒤 해체를 실행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항일 구호를 마음껏 외치며 거리낌 없이 활동하다가, 일제의 탄압이 아닌 스스로의 결의와 함께 바람처럼 사라졌던 것이다.
절묘한 정세 판단으로 적박단 해체를 주도한 안병희는 세계적인 수학자이자 통일운동가인 안재구(1933~2020) 전 경북대 교수의 할아버지다. 안재구가 쓴 <할배, 왜놈소는 조선소랑 우는 것도 다른강?>에 따르면, 1890년에 경상도 밀양에서 출생한 안병희는 16세 때인 1906년에 집안 노동자들 앞에서 노비문서를 소각하고 땅문서를 분배한 뒤 서울행 기차에 올라탔다. 그의 집안은 발칵 뒤집어졌다.
1894년의 노비제 폐지로 노비문서는 이미 사문화돼 있었지만, 자기 땅이 없어 여전히 주인에게 의존해야 하는 전직 노비들에게는 아직 살아 있었다. 전직 노비들을 모아놓고 노비문서를 소각한 것은 해고 통지나 마찬가지였지만, 동시에 땅문서를 나눠줬으니 그 의미는 달랐다. 자기 집에서부터 무계급사회를 실천한 셈이다. 그 집 노동자들은 집안 어른들에게 땅문서를 반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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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1년 1월 27일 자 <동아일보> 3면 좌중단에는 안병희가 임시의장이 되어 신간회 밀양지회 정기대회를 열었다는 소식이 보도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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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묘한 시점에 적박단을 해체해 단원들의 안전을 지켰지만, 정작 그 자신은 적박단 활동으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29년에 석방됐다. 서른아홉이 되어 귀향한 그는 또다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아버지 안재구>는 "1927년에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이 연합해 결성한 통일전선 조직인 신간회의 밀양지회에서 총무간사로 활동했다"라며 "백정들의 신분 해방을 위해 진주에서 결성된 조선형평사에도 참여했다"라고 한 뒤, 형평사 기관지 창간호인 1929년 5월호 <정진>에 안병희가 쓴 '형평운동의 정신'이 실린 일을 소개한다.
안병희는 언론의 주목을 받는 운동가였다. 1931년 1월 27일 자 <동아일보> 3면 좌중단에는 그가 임시의장이 되어 신간회 밀양지회 정기대회를 주재한 일이 보도됐다. 그렇게 알려진 인물인데도 그는 일제 막판에 무장투쟁에 뛰어들었다. <아버지 안재구>는 안병희가 강제징용과 강제징병을 거부하는 청년들을 밀양 화악산 밀림에 모아놓고 군사조직을 꾸린 일을 소개한다. 적박단 때의 기백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안병희는 해방 직후에 건국준비위원회 밀양지부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의 뜻은 미군정하에서 꺾였다. 그는 남북이 분단되고 전쟁까지 벌이는 것을 목격했다. 그런 뒤 "너도 자식들에게 올바른 세상을 물려주겠다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한다"는 유언을 손자에게 남기고 1953년 12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안재구>에 따르면, 1987년 6월항쟁 이후에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유공자 훈장을 받는 것을 보면서 증손 안영민이 손자 안재구에게 안병희의 독립유공자 지정 문제에 관해 이야기한 일이 있다. 안재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내 할아버지가 반쪽나라, 그것도 미국놈이 세운 나라에서 주는 훈장을 받을 분이겠나? 오히려 부끄러워하실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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