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처럼 스미네, 이중섭의 사랑
발가벗은 아이 셋이 물놀이하는 모습은 펜으로 쓱쓱 그렸다. 펜이 채 마르기도 전에 붓을 잡고 선을 세 개 내리그었다. 폭포수 같이 뻗은 물줄기는 투명한 수채물감으로 표현했다. 관제엽서 크기 손바닥만 한 화면이지만 있을 건 다 있다. 왼쪽 위에 서명도 남겼다. ‘ㄷㅜㅇ서ㅂ 1941.9’. 스물다섯 살 이중섭(1916~56)의 수채화다.
이중섭은 1939년 도쿄 문화학원에서 한 해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난다. 도쿄에서, 또 원산으로 돌아간 뒤에도 꾸준히 엽서를 그려 보내 마사코에게 구애했다. 두 사람은 태평양전쟁의 전운이 짙어가던 1945년 초 원산에서 결혼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피란선에 올랐다. 마사코가 간직하던 엽서화는 1979년 서울 미도파백화점에서 열린 이중섭 회고전에서 처음 공개됐다. 일부가 2021년 이건희컬렉션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됐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에서 이중섭의 엽서화 18점을 비롯해 구본웅·곽인식·류인·박서보·박수근·이두식·이인성·장욱진 등 화가 34명의 수채화 100여 점이 전시 중이다. 소장품 기획전 ‘수채: 물을 그리다’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수채화만으로 전시를 여는 건 처음이다. 전시를 꾸린 정재임 학예사는 “23점가량은 이번에 처음 공개된다. 이인성만 해도 수채화로도 독보적인데 한 번도 전시되지 못한 작품도 있다. ‘수채화라서 그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수채화에 대한 첫 기록은 1884년 ‘한성순보’에 남아 있다. 런던 수정궁의 전시를 묘사하며 “뒷줄에는 유명 화가들의 유화와 수화(水畵) 120여 점을 진열해 놓았다”고 썼다. 1911년 ‘매일신보’에는 일본 화가 야마모토 바이카이가 연필화·수채화·유화 등을 강습한다는 공고를 냈다. 수채화는 수묵에 익숙했던 초창기 서양화가들이 사생을 통해 실제 풍경과 정물 묘사를 익히기에 맞춤한 장르였다. 재료를 구하기도 쉬웠다. 그러나 잘 그리기는 쉽지 않다. 색은 잘 번져 섞여 버리고, 금방 말라 고칠 수도 없다. 그런데도 습작이나 아이들 그림으로 쉽게 무시되곤 한다.
전시장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은 서동진의 ‘뒷골목’(1932). 최초로 수채화 전시를 열었던 서동진은 20세기 초 대구 수채 화단을 이끌며 서진달·이인성을 지도했다. 이인성의 ‘계산동 성당’(1930년대)은 수채화의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1902년 영남 최초 고딕식으로 건축된 성당으로 지금도 대구 서성로에 남아 있다. 장욱진의 수채화 ‘마을’에는 집 안마다 사람들이 오밀조밀 들어가 있고, 박수근의 ‘세 사람’에서는 작가 특유의 인물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과감하게 생략된 신체의 조각가 류인은 수채화에서도 대담한 화면 분할과 거친 붓질을 구사했다. 강렬한 오방색에 분방한 붓질의 유화 ‘축제’ 시리즈의 이두식은 돌과 나뭇잎을 치밀하게 묘사 후 인체를 숨겨둔 초현실적 수채화 ‘생의 기원’을 남겼다. 꽃잎이 겹쳐지듯 반투명한 작은 타원들로 큰 화면을 꽉 채운 곽인식의 수채화, 검은 물감에 흠뻑 적신 닥지를 손으로 밀고 나가며 흔적을 남긴 박서보의 중기 ‘묘법’도 걸렸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불투명하게 융합되지 않고, 자신을 잃지 않은 채 서로를 드러내는 수채화의 포용과 어울림의 속성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적용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9월 7일까지, 성인 2000원.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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