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비통 트렁크와 떠난 차준환의 얼음 왕국
오랜 세월 그 자체로 작품이 되어 여행 문화를 정의해 온 루이 비통 트렁크가 자신만의 여정을 통해 대체 불가능한 성과를 이뤄온 아이코닉한 여행자의 창의적 도전을 따라나섰다. 〈엘르〉와 루이 비통이 함께 시작하는 스페셜 시리즈 ‘아트 오브 트래블(Art of Travel)’은 루이 비통 트렁크와 여행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예술적 여정’으로 탐색하는 프로젝트다. 그 첫 번째 인물은 지난 15년간 창작이 주는 즐거움을 좇아 피겨스케이팅을 이어온 차준환 선수. 인생의 반 이상 차가운 얼음 위에서 뜨거운 땀을 쏟아온 스물네 살 청춘의 얼굴에는 차분하고 강한 빛이 담겨 있다. 단 한 번의 점프, 단 한 번의 스핀에 혼신의 힘을 실어온 차준환의 금빛 여정.
Q : 하얼빈 동계 아시안게임과 목동에서 열린 사대륙선수권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만 오늘도 훈련을 하고 왔습니다
A : 피겨 시즌은 보통 가을에 시작해 3~4월쯤 마무리되는데, 올해는 특히 일정이 빡빡했어요. 종합선수권에 이어 유니버시아드, 아시안게임까지 추가되면서 유난히 바쁜 시즌을 보냈죠. 이번 시즌 남은 경기는 3월 보스턴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으로, 그 대회를 준비 중이에요. 시합이 연이어 있는 만큼 컨디션 회복에 집중하며 훈련을 이어가고 있어요.
Q : 음악 선택부터 기술 연습, 표현력까지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이 늘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선보이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을 들이는 편인지
A : 보통 5월쯤 새로운 시즌의 음악과 안무를 정하고 창작을 시작해요. 이후 약 4개월 동안 안무를 익히고 연습하며 준비하죠. 시즌이 진행되고 나서도 일부 동작을 수정하거나 발전시키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Q : 새 프로그램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나 감정을 스케이팅으로 풀어가는 즐거움이 있나요
A : 항상 스스로를 음악에 태우는 편입니다. 나만의 표현을 생각할 때 노랫말에 집중하는데, 이번 프리 프로그램에서 선택한 아스트로 피아졸라의 ‘미치광이를 위한 발라드’는 스페인어와 영어 가사를 비교하며 곡의 의미와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했어요. 예를 들어 피겨스케이팅의 구성 요소인 스텝 시퀀스에서 ‘곡예사처럼 뛰어들 거예요’라는 가사를 담기 위해 동작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표현할지 세심하게 연구했어요. 이런 디테일을 고민하는 과정이 재미있어요.
Q : 그런 고민 끝에 음악과 하나가 되는 표현 연기가 탄생하는군요. 힙합 댄스부터 현대무용 등을 통해 음악과 무용적인 감각을 키운 것으로 압니다. 지금 차준환이 집중하고 있는 기량은
A : 이번 시즌에는 예술성보다 스포츠 선수로서 필요한 훈련에 집중했어요. 지난 시즌에 부상 경험이 있어서 몸 관리를 더 철저히 했죠. 게다가 저는 골격이 크고 신장이 커서 몸을 가볍게 만들어야 부상 위험을 줄이고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부상을 계기로 몸 관리에 더 신경 썼습니다.
Q : 하얼빈 동계 아시안게임에서 ‘남자 피겨 최초 금메달’을 기록했습니다. ‘최초’라는 타이틀이 어떤 의미로 다가왔나요
A : 영광스럽죠. 선배 선수로서 한국의 어린 선수들에게 ‘우리도 잘할 수 있다. 노력하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기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 뜻깊었습니다.
Q : 아시안게임 경기 후 인터뷰에서 “지난 올림픽의 배움을 적용했다”던 말이 기억납니다. 그 배움은 무엇이었나요
A : 베이징 올림픽 쇼트 프로그램에서 4위를 하고 난 후 ‘혹시 나도 잘하면 3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메달을 기대했어요. 그런데 프리 프로그램에서 첫 번째부터 큰 실수를 했죠. 그 이후는 잘 마무리해서 만족스럽게 끝났지만 한순간 일말의 기대를 품었던 걸 후회했어요. 그동안 해온 대로 내 경기 자체에만 집중하면 좋았을 텐데. 이때의 배움을 바탕으로 아시안게임에선 완전히 비우고 나에게만 집중했어요. 평소에도 다른 선수들의 점수나 경기 흐름에 신경 쓰지 않는데, 이번 쇼트에서는 마지막 순서라 앞선 경기와 상관없이 온전히 제 경기만 생각했어요.
Q : 지난해 11월 발목 부상으로 그랑프리 5차 대회에서 조기 귀국했습니다. 당시 선수로서 쉽지 않은 시기를 보냈을 것 같습니다
A :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했어요. 부상 중에 경기를 이어가다 보니 여러 가지로 고민이 많았죠. 한편으로는 ‘차라리 일찍 시즌을 마치고 부상 회복에 전념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죠. 하지만 세계선수권은 매해 출전권이 걸려 있고, 이번 시즌은 올림픽과 연결되다 보니 포기할 수 없었어요. 저는 경기를 치르면서 점점 ‘빌드업’되는 스타일이라 앞선 대회들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결국 부딪치면서 시즌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시기는 그냥 그렇게 흘렀던 것 같아요.
Q : 부상 등 예기치 않은 슬럼프와 맞닥뜨릴 때, 그 시기의 어려움을 어떻게 겪거나 맞서나요
A : 슬럼프가 왔을 땐 할 수 있는 게 사실 별로 없어요. 빨리 벗어나려 해도 결국 시간이 흘러야 하기 때문에 그 시간을 온전히 다 ‘맞아내는 게’ 극복하는 방법이에요.
Q :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경기에 집중한 결과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강인한 정신력’이라는 특유의 강점은 어디서 오나요
A : 지난 시즌 후반부는 부상 상태로 경기를 치르다 보니 정신적으로 부담이 컸고, 힘든 시기였어요. 하지만 막상 경기장에 서면 그 순간에 집중하게 돼요. 중요한 건 최선을 다해 연습하고, 시합에서는 그 순간에 몰입하는 거예요. 물론 시합은 늘 긴장되지만, 그간 경험을 통해 하나 터득한 것은 순간의 집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이에요.
Q : 몰입을 위해 경기 때마다 되뇌는 주문이 있나요
A : 잘하길 바라지 않아요. 최대한 단순하게 생각해요. 열심히 하자는 마음가짐은 오히려 연습 때 유효한 것 같고, 경기에서는 복잡한 생각을 지우죠.
Q : 지금까지 해온 프로그램을 다시 보기도 하나요? 만약 그렇다면 다시 해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는지
A : 지난 프로그램을 계속해서 보는 편이지만 경기에 임할 때 ‘후회 없이 하자’는 게 제 철칙이기 때문에 다시 하고 싶은 프로그램은 없어요. 너무 고민하거나 망설이다 실수하면 후회가 될 것 같아서 단순히 생각하고, 저돌적으로 경기를 치르죠.
Q : 2026년에는 밀란-코르티나 동계올림픽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가올 올림픽에서 이루고 싶은 것은
A : 세 번째 올림픽 도전인 만큼 지난 경험을 바탕으로 철저하게 준비하고 싶어요. 세계인의 축제인 만큼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경기를 만들고 싶은 바람도 있어요. 최선을 다해 준비하되, 경기 자체를 온전히 만끽하는 게 제 목표입니다.
Q : 아홉 살에 선수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15년이 흘렀어요. 가장 크게 변한 건 무엇일까요
A : 돌이켜보면 저에겐 모든 경기가 중요한 계기였어요. 다양한 단계를 거치며 발전하고 변화했죠. 성취나 결과를 떠나 어린 나이에 운동선수라는 직업을 선택했기 때문에 선수뿐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도 많은 게 변했죠.
Q : “피겨스케이팅은 나의 이야기를 전하는 창구”라고 말한 적 있어요. 지금 피겨스케이팅으로 말하고 싶은 차준환의 이야기는
A : 이번 시즌 프로그램은 모두 저를 대변하는 이야기였어요. 쇼트 프로그램에서는 이매진 드래곤스의 ‘내추럴’을 선택했는데 ‘할 수 있다’ ‘절대 포기하지 말고 냉정해져라’ 같은 가사를 통해 부상으로 힘든 시기를 극복해 변화하고 싶은 제 마음을 담았습니다. 갈라 프로그램 때 선택했던 로익 노테(Loïc Nottet)의 ‘무슈/마담(Mr/Mme)’은 솔직하고 시적인 느낌이 저와 닮은 것 같아요.
Q : 오늘 함께한 루이 비통은 오랫동안 하우스의 핵심 DNA인 ‘여행’을 예술로 승화해 왔어요. 차준환의 시간도 수많은 여정으로 빼곡합니다. 훈련이나 경기를 위해 다양한 나라를 여행해 왔어요. 중학생 때 캐나다로 전지훈련을 떠나 긴 시간을 보내기도 했죠. 전 세계 곳곳을 오가며 쌓아온 시간을 돌이켜본다면
A : 기본적으로 어디에 가든 경기에만 집중하는 편이라 ‘여행’이라고 부를 정도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 적이 거의 없어요. 솔직히 말하면 스무 살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시합 후 잠깐의 자유 시간을 즐겨봤습니다(웃음). 대회가 끝난 뒤 짧게 외출해 현지 음식을 맛보거나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기는 정도로요. 훗날 훈련이 아닌 여행으로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꼭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아요. 스위스와 프랑스를 제대로 여행해 보고 싶고, 캐나다 전지훈련 때 못 가본 로키산맥도 경험해 보고 싶어요. 8년 동안 토론토에서 생활했지만, 아버지와 함께 관광차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본 것 외에는 다른 지역을 제대로 둘러볼 기회가 없었어요. 그 점이 늘 아쉬웠는데, 언젠가는 온전한 여행자로서 새로운 곳을 자유롭게 탐험해 보고 싶어요.
Q : 루이 비통의 상징적 오브제인 트렁크는 탐험과 여정의 초월적 가치를 이야기해 왔습니다. 차준환 선수가 경험한 모든 시간은 훗날 어떤 여정으로 남을까요
A : 저에게 이 여정은 여러 권으로 기록된 인생 일기로 남을 거예요. 제 인생의 중요한 기록이 되어 그때 느꼈던 생각을 고스란히 되새길 수 있는 소중한 여행이 될 것 같습니다. 모든 프로그램과 경기에는 당시 제가 겪은 감정까지 모두 담겨 있어 세월이 흐른 뒤 돌아보면 한 장면씩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을 거예요.
Q : 루이 비통 트렁크 중에서 앞으로의 여정에 필요한 한 가지를 골라본다면
A : 손잡이가 있는 핸드 캐리용 작은 수트케이스요. 경기 의상을 담을 수 있는 수트케이스라 대회를 위해 여행할 때마다 들면 좋겠어요. 이 특별한 수트케이스에 시합을 위해 떠나는 여행에서 쌓은 소중한 추억도 함께 담을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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