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탈출한 모자가 돈 이야기만 하던 까닭

이정희 2025. 3. 26.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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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다큐인사이트 <엄마, 영순>

[이정희 기자]

 다큐 <엄마, 영순>스틸 컷
ⓒ KBS
KBS1 <다큐인사이트>가 지난 20일 14회 DMZ 영화제에서 상영된 <엄마, 영순>을 방영했다.

다큐의 시작은 부산의 한 바닷가로부터 시작된다. 사람들이 즐겨 찾는 이곳 바닷가, 그런데 그 바다를 보는 엄마 영순 씨의 표정이 밝지 않다.

"바다를 보면 무서워요. 아직도 물에 들어가는 꿈을 꿔요."

영순씨는 북한을 탈출하기 위해 아들 소사와 함께 물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모자는 거센 물결에 서해까지 휩쓸려 갔다. '죽어야겠구나', 아들 소사가 생각했다. 다행히 서해에서 낚시를 하던 중국 배 두 척 사이에 끼인 모자, 그들이 구출해 줘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

구사일생 목숨을 건진 엄마는 매일이 고맙고 감사하다.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고, 더 물 하나 나오는 것도 고맙단다.

악착같은 엄마의 베짱이 아들
 다큐멘터리 <엄마, 영순> 스틸 컷
ⓒ KBS
2017년 탈북민 지원을 받아 푸드 트럭을 운영했다. 엄마는 샌드위치 등을 만들고, 아들은 트럭 밖에서 손님을 맞는다. 하루 장사를 끝내고, 장사해서 번 돈을 세는 엄마의 얼굴은 밝다. 반면 뒤처리를 하는 아들은 "이 나이에 힘들어요"라고 말한다. 일을 하지 않을 때면 종일 방 안에 누워 TV만 보고 있다. 북한의 동정을 보여주는 방송 속 북한 사람들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를 짓는 아들, 그런 아들을 보며 엄마는 말한다. 자기가 가자고 한 것도 아닌 아이를 생땅에 데려다 놔서 그런가, 도무지 속내를 모르겠다고.

하루 종일 함께 있어 봐야 대화다운 대화 한번 하지 않는 모자, 엄마랑은 돈 얘기 아니면 안 한다는 아들이다. "남들은 몇 천 만원 짜리 시계를 찬다"며 부러워하는 아들을 엄마는 한심해한다. 오죽하면 푸드트럭 장사가 끝나면 너랑 나는 끝이라며 어깃장을 놓을까.

그도 그럴 것이 엄마는 악착같이 살아간다. 푸드 트럭을 하지 않는 평일에는 공사 현장을 뛴다. 엄마는 그저 열심히 씩씩하게 사는 걸 보여주는 게 엄마 노릇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에서도 그랬다. 15년 동안 통잠을 자본 적 없이 압록강 변에서 밀수를 했다. 구리에 약초에, 돈도 많이 벌었다. 북한 사람들은 다 못 산다지만, 그녀는 100평에 방 5개 짜리 집에서 살았다.

부러울 것 없이 산 그녀는 왜 탈북을 선택했을까. 그녀의 아버지는 국군 포로였다. 겨우 가정을 꾸린 남편은 애들을 심하게 다뤘다.

영순씨는 남편의 상황도 안쓰러워했다. 형은 탄광에서 돌에 깔려 죽었고, 동생은 정치범이 되어 죽었다. 아버지, 엄마, 누나가 다 '청산'되고 말았으니, 견딜 도리가 있겠냐는 거다. 학교 선생님이 선생 생활 40년 만에 가장 똑똑하다던 큰아들은 집이 감옥 같다며 17살에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아끼던 큰아들이 떠나고 죽을 것 같았다던 영순 씨는 3년 뒤 북한을 떴다.

그녀가 북한을 등진 게 7월, 바로 한 달뒤 밀수하던 13명이 잡혀 총살을 당했다. 그래도 내려와 악착같이 살았던 덕분일까. 여기저기 은행에서 묻혀둔 그녀의 적금이 쌓여가고 있다. 그 덕분에 푸드 트럭 장사를 끝낸 후 그녀는 펜션을 하나 마련 아들에게 관리를 맡겼다.

아들의 자존심
 다큐멘터리 <엄마, 영순> 스틸 컷
ⓒ KBS
그런데 정말 아들은 베짱이이기만 할까. 제 스타일이 아니라면서도 아들 소사는 부지런히 움직인다. 이불도 털고, 쓰레기에 수챗구멍까지 깨끗이 비우고, 한결 얼굴이 밝다.

'아직 처음이라 느리지만 똑똑해요', 아들에게 펜션 일을 가르쳐 주던 사람의 평가는 '글이나 익히면 다행'이라던 엄마와 사뭇 다르다. 심지어 펜션이 아직 돈이 되지 않자, 나서서 폐지와 공병 모으는 일을 하며 어떻게든 애를 쓴다.

하지만 삶은 녹록지 않다. 이 펜션을 판 사람은 마트를 운영하는데, 그 마트 위층에 머무르는 아들 소사를 호시탐탐 부려 먹는다. 잠시 와서 마트를 봐 달라거나, 때론 산에서 키우는 개 먹이 심부름까지 시킨다. '북한 애들 싸가지 없다'는 소릴 듣기 싫어 소사는 묵묵히 견딘다.

도무지 속내를 보이지 않던 아들이 힘들게 입을 연다. 소사는 엄마가 "밥 한 번 해준 적이 없다"고 했다. 밖으로 돌던 엄마는 한 달에 한 번 얼굴을 볼 때도 있었다. 아빠한테 쫓겨나 할머니 집에 머물다 6개월에 한 번 본 적도 있다. 엄마가 데면데면한 게 소사에겐 이상할 일이 아니다. 그런 엄마가 어디 가는지 말하지도 않고 자는 소사를 깨워 강에 뛰어들어 자신을 이곳에 데려다 놓았다.

게으르다는 엄마의 평가와 달리, 남으로 내려온 소사는 18살 때부터 일을 했다. 철강 공장에서 포크레인도 몰아봤고, 천안 냉장고 공장에도 있었다. 48시간, 52시간 노동은 여사였다. 하지만 현장에서 탈북민은 베트남 사람들보다도 더 못한 대우를 받았다. 성실하게 일을 해도 밥 얻어먹으러 온 '거지새끼' 취급을 당했다.

왜 엄마에게 그런 얘기를 하지 않느냐는 제작진들의 질문에, 소사는 그게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답한다. 차라리 엄마한테 무시당하는 게 낫지, 아들이 밖에 나가 무시당하는 건 보여주고 싶지 않단다. 그러면서 "내가 자식이 있어, 내 자식이 나가서 그런 취급을 당하는 걸 알면 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지 않겠냐"고 한다. 엄마한테 그런 아픔은 주고 싶지 않다는 아들 소사, 그는 속이 없는 철부지가 아니라, 속이 깊은 아들이었다.

뒤늦게 현원에 계신 아버지를 찾은 엄마 영순씨는 "아들 하나 데리고 아버지 몫까지 잘 살게요"라고 고개를 숙였지만, 돌아온 현실은 생각과 다르다. 결국 펜션에 설치된 불법 계단으로 인해, 손해를 보고 보고 펜션을 처분하게 됐다. 함께 일하던 남자에게서 귀걸이까지 받은 사이가 된 영순씨, 그래서 더는 바다가 무섭지 않다는. 영순씨의 집에는 소룡이 인형, 소사 인형 인형들만 그득할 뿐 소사의 방은 비어 있다.

다큐는 영순씨네 모자의 현실과, TV를 통해 방영되는 북한의 동정, 2018년 남북 정상회담, 탈북민들이 경제적 어려움에 다시 철조망을 넘기도 한다는 뉴스 기사를 교차한다. 앞부분에서는 열혈 엄마 영순씨의 삶과 생각을 보여주고, 뒷부분에서 반전처럼, 본의 아니게 이 사회에서 탈북민으로 살아가게 된 청년 소사가 말할 수 없는 속내를 보여준다. 탈북민의 빛과 그늘이 진솔하게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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