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국악과가 국립국악원장 30년 독점? 국악계 전체 모독하는 갈라치기"
"서울대 국악과 출신이 지난 30년 동안 국립국악원장 자리를 독점했다." 유인촌 문체부 장관이 21일 한 행사에서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팩트다. 그런데 사정이 있다. 대학 국악과는 1959년 서울대에 최초로 설립됐고, 72년에 두번째로 한양대에, 74년에 세번째로 이화여대, 81년에 네 번째로 중앙대에 개설된 이후 지방에도 전남대 등에 차례로 개설됐다. 통상 50대 후반 이상의 경력자가 맡는 것이 관례인 공공예술기관장 자리가 서울대 국악과 졸업자에게 편중됐던 이유다.
10개월째 공석인 국립국악원장 인선을 놓고 때아닌 분란이 일고 있다. 25일 국립국악원 전임 원장과 국악연구실장 등을 중심으로 꾸려진 국악계 현안 비상대책협의회(이하 비대협)는 ‘국립국악원 관치행정 반대 기자간담회’를 열고 “행정직 공무원의 국립국악원장 임명을 반대한다”며 재공모를 촉구했다.
문체부 고위공무원인 유병채 국민소통실장의 임명이 유력하다고 알려져서다. 국립국악원장은 원래 민간 전문가만 지원할 수 있었던 경력개방형 직위였으나 지난해 12월 31일 대통령령 개정으로 행정직 공무원도 지원할 수 있는 개방형으로 바뀌었다. 대통령실 비서관을 지낸 유 실장은 지난해 김건희 여사의 ‘KTV 국악공연 황제관람’과 관련해 국정감사에서 거짓해명으로 논란이 됐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국악계는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지난 7일 비대협에 이어 18일 국립국악원 전·현직 예술감독 28명이 성명서를 발표했고, 19일에는 (사)한국국악학회 등 국악관련 학회 대표들도 뭉쳐 “문체부가 행정직 공무원을 국립국악원 원장에 임명하려는 발상은 정국 혼란기에 편승한 ‘불순한 알박기’로 오해되기에 충분하다”고 비판했다. 같은 날 대한민국 국공립 지휘자 협회에서도 “국립국악원장 인선에 관료를 배제하고 공정성과 전문성을 보장하라”며 동조에 나섰다.
이런 흐름에 유인촌 장관이 “국악계에서 80% 이상이 기존처럼 국악계 인사가 국립국악원장을 해야 한다고 의견을 내면 따르겠다”면서도 지난 30년간 서울대 국악과 졸업자가 독점해왔다고 언급했고, 이에 비대협은 “행정직 출신 임명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해 국악계에 대한 악의적인 갈라치기에 나선 것”이라고 비판했다.
지난해 6월 퇴임한 김영운 전 국립국악원장은 “73학번인 나와 전임 김해숙 원장 이전에는 서울대 졸업생 말고는 경쟁상대가 없었다. 2015년 이후 타 대학에서도 다양한 교육배경을 가지고 경륜을 갖춘 응모자들이 있었지만 엄격한 정부의 인사검증을 통과하지 못한 것으로 안다”면서 “후배들 가운데 차세대 리더십은 지방분원장을 보면 알수 있다. 부산과 남원, 진도 3곳의 분원장 중 2명은 전혀 다른 배경을 가졌다. 특정 학맥 편중현상은 시간이 해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80% 여론조사에 대해서도 “헌법개정보다 어려운 조건”이라며 “장관이 어떻게 여론조사를 한다는 것인지도 알수 없고, 투표참여자의 깊이있는 이해와 공정한 판단을 담보할 수 없는 여론조사 방식에 동의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국악은 일제강점기 이후 불과 20년 전만 해도 소멸 위기를 걱정해야 했던 분야인 만큼, 1951년 전쟁통에서도 용두산 기슭에서 국립국악원을 개원하며 전통을 필사적으로 지켜낸 국악인들의 주인의식이 유독 강하다. 이들이 국립국악원장에 행정직 공무원 임용을 결사반대하는 명분은 지금까지 고도의 전문성으로 명맥을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국립국악원은 단순한 공연단체가 아니라 신라 음성서로부터 이어지는 역사를 가진 국가적 기관이며, 전통예술의 계승·연구·교육·창작·보급을 아우르며 정체성을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할 책임을 국악인들 스스로가 강조하고 있다.
김영운 전 국악원장은 “행정직은 국악의 역사나 장르별 특성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다. 일례로 재임 시절 종묘제례악이 해외에서 먼저 호평을 받길래 전국 순회연주를 추진했고, 내가 직접 해설할 때 관객들 눈빛도 달라지는 걸 느꼈다. 전문가이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반면 문체부가 행정직 공무원의 국악원장 임명을 추진하는 배경은 ‘예술과 행정의 분리’다. 유인촌 장관은 최근 국립예술단체 사무처 통합을 추진하며 “예술과 행정을 분리함으로써 예술가들이 예술만 편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국립국악원에는 2급 공무원이 파견되는 기획운영단장을 비롯해 3,4급 기획과장 등 행정인력이 이미 다수 업무를 보고 있다. 지금까지 국악원장은 예술 정책 관련 판단과 행정에 역량 갖춘 인물이 맡아왔고, 혹시라도 행정에 부족한 부분을 보조하기 위해 국장·과장급 공무원들이 파견되어 왔기에 공무원의 원장 임명은 당위성이 없다는 것이 비대협의 주장이다.
비대협 간사인 김희선 국민대 교수는 “원장부터 과장까지 공무원이 차지한다면 예술을 행정의 대상, 관리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이라며 “올해는 국악진흥법 시행 첫해다. 국악원은 국악의 미래를 고민하는 국악의 종가로서, 국악원장은 미션을 설정하고 국악계와 함께 의견을 모으고 완수하는 자리다. 어렵던 시절 국악계의 필사의 노력이 있어 현재 자랑스런 분야로 사회에 온전히 자리잡았다. 국악계를 적폐로 내모는 갈라치기 시도는 국악계 전체를 모욕하는 행위라고 생각해 분개한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간담회에는 윤미용, 김해숙, 김영운 등 전임 국립국악원장들을 비롯해 변미혜, 김희선, 김명석 등 전임 국립국악원 연구실장, 이춘희, 곽태규 등 국립국악원 전직 예술감독, 이상규, 김혜정 등 국악관련연구학회장, 허윤정 서울대 교수, 정은경 부산교대 교수 등 전국 대학 국악과 교수협의회 대표, 이건석 전주시립국악관현악단 지휘자 등 대한민국 국공립예술단 국악지휘자 협회 대표 등이 참석했다.
한편 26일에는 전국 총 13개 대학 국악과 · 한국음악과 교수 일동(대표 허윤정 서울대 국악과 학과장)이 입장문을 내고 "문체부는 국립국악원장에 행정직 고위 공무원을 임명하려는 시도를 즉각 중단하라""국악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훼손하는 어떠한 인사 결정도 받아들일 수 없다""국악 전문성과 예술적 역량을 갖춘 인물이 국립국악원장으로 임명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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