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노동자가 서울 한복판 30m 철탑에 올랐다
김형수 금속노조 조선하청지회장, 고공농성 12일째…탄핵 정국 속 언론 무관심
[미디어오늘 장슬기 기자]
지난 15일 오전 4시경, 한화오션(옛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가 서울 중구 한화 본사 앞 철탑 위에 올랐고 비닐 하나로 버틴지 12일째다. 김형수 금속노조 경남지부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장이 30m 높이의 교통 관제용 CCTV 철탑에 오른 표면적인 이유는 지난해 단체교섭에서 상용직(하청업체 무기계약직) 확대와 하청노동자 임금 처우 개선(삭감된 임금 회복)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다.
한화오션 측은 조선하청지회가 주장하는 '삭감된 상여금 550%'는 사내 협력사(하청업체)들이 2018년 이후 기본급으로 전환했고 노조의 요구는 협력사들과 교섭 내용이라 현행법상 허용되지 않지만 사내 협력사들 측과 단체교섭이 잘 이뤄지길 바란다는 입장이다.
언론 입장에서 이 사건을 보도해야 할 이유는 많다.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노조법 2·3조 개정안(노동자·사용자 범위를 확대해 실질적인 결정권한이 있는 원청 사용자와 협상할 수 있도록 하고 노조 쟁의행위에 대한 무분별한 손해배상 청구를 막는 등의 내용을 담은 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두차례 통과했지만 둘다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무산됐는데 조선업체 하청노동자들에게 절실한 법이다. 국제노동기구(ILO)까지 나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지적한 상황이다.
한화오션 하청노동자들의 상황은 답답하다. 조선하청지회는 지난해 4월부터 한화오션 사내하청업체 20곳과 교섭을 시작했다. 집단교섭을 요구했지만 묵살됐고 개별교섭을 개시했다가 19개 업체에서 집단교섭에 응했지만 이들과 의미있는 교섭을 하긴 어려웠다. 지난해 11월 경남 거제 한화오션 옥포조선소 천막농성을 하면서 김 지회장은 23일, 강인석 부지회장은 49일간 단식에 나서기도 했다. 최근 조선업이 호황을 맞았지만 삭감된 임금은 오를 줄 모르고 이들은 최저임금 수준을 받는 열악한 상황이다.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이후 이어진 탄핵 국면으로 모든 이슈가 한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런 가운데 대우조선해양 시절 하청노동자들이 파업 중이던 2022년 7월 명태균씨가 '강경진압'을 윤 대통령 부부에게 요청했다는 내용의 녹취가 뒤늦게 공개됐다. 명씨 녹취에 따르면 대우조선해양 임원에게 보고서를 받아 대통령 부부에게 보고했고 이후 한덕수 총리가 관계부처와 긴급회의를 열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대우조선해양 임원은 파업 당시 명씨를 본적이 있다고 밝혔으니 대통령 파면 이후 진상규명이 필요한 사안이다.
해당 파업으로 하청노동자들이 원청과 교섭테이블에 앉는 역사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2022년 파업을 이끈 김 지회장은 지난 2월 1심 형사재판에서 업무방해 등 혐의로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 벌금 100만원을 선고받았고 사측은 하청지회 간부 5명에게 470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임금체불이 누적돼 온 사실도 드러났다. 이렇듯 파업 후 오히려 상황이 악화되자 김 지회장이 철탑에 오른 것이다.
약 10층 높이 철탑은 실제로 보면 아찔하다. 비좁아 편하게 누울 수도 없다. 그가 오른 뒤, 3월 중순인데 눈이 내리기도 했고 여전히 꽃샘추위로 칼바람이 분다. 25일 기준 서울 땅위의 날씨는 풀렸다지만 30미터 위 하늘은 그렇지 않았다. 김 지회장은 이날 미디어오늘에 “오늘은 바람이 너무 많이 분다. 위는 아직 춥다”고 전했다.
자신을 갈아넣어 스스로 고통을 짜내야 기사가 몇 개라도 나온다. 김 지회장이 상공에 오른 뒤 일부 언론(지면기준)에서 이 소식을 전했다.
<“원청 한화오션이 교섭에 나서라” 조선소 하청 노동자의 외침>(경향신문 3월17일)
<단체교섭 결렬…한화오션 하청 노조 30m 고공농성>(경남신문 3월17일)
<“삭감된 상여금 회복을” 한화 하청 노동자 고공농성>(한겨레 3월17일)
<벼랑 끝 내몰린 한화오션 하청노동자, 처절한 고공농성>(경남도민일보 3월17일)
<3년 전 철제감옥 지금은 공중 감옥 “차별말라” 처절한 외침>(경남도민일보 3월21일)
<조선하청노동자 다시 고공농성 나선 이유>(경남도민일보 사설, 3월24일)
그 외 오마이뉴스 15일자 <조선하청지회장, 한화 본사앞 철탑 고공농성 시작>, 뉴스타파 20일자 <조선 하청 노동자가 30m 철탑에 오른 이유>, 한겨레21 21일자<김형수 조선하청지회장 “무릎 꿇으라면 '왜?'라고 묻겠다”> 등이 사안을 자세하게 다뤘다.
일부 언론은 한화오션 입장도 비중있게 실었다. 국민일보는 17일자 <조선하청노조, 한화 본사 앞 고공농성 왜?>란 기사에서 노조가 “한화오션 측이 교섭을 결렬로 몰아갔다”고 했지만 한화오션 측 입장은 다르다고 반박 내용을 실었다. 같은날 디지털타임스도 고공농성 소식을 전하면서 <하청노조 “상여금 올려달라” 한화오션 “법적 관여 불가”>란 기사에서 양측의 입장을 전했다. 두 기사가 양측의 입장을 모두 다뤘지만 기사가 다소 짧아 노조의 요구가 임금인상뿐인 것처럼 보일 우려가 있다.
조선업계에선 일감을 따오면 그에 맞춰 인력을 늘리기 위해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쓰고 불황이 오면 이들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노무관리를 해왔다. 이에 오늘의 투쟁에는 그동안 조선업계 비정규직들이 희생해온 과거의 역사가 녹아있다. 또한 대우조선해양 경영진의 무능·비위와 그럼에도 쏟아부은 조 단위의 공적자금이 하청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분배되지 못하는 등의 구조적인 문제를 짧은 기사로는 다루기 어렵다. 그나마 이러한 언론보도조차 드물고 대다수 지면에서는 고공농성 소식을 찾아보기 힘들다.
반면 한화오션의 경영실적을 홍보하는 기사는 쉽게 찾을 수 있다. 18일에 10개 넘는 매체(지면기준)에서 한화오션이 대만 에버그린에 초대형 컨테이너선 6척 건조 계약을 수주한 소식을 전했다. “잭팟 이어지는 'K조선'”(서울경제), “K조선 잇단 수주 '잭팟'”(세계일보) 등을 보면, “벼랑 끝에 내몰린”(경남도민일보) 하청노동자들과 달리 조선업계는 호황인 것으로 보인다. 대한경제 19일자 기사를 보면 한화오션이 국내 조선업계에서 시장 점유율을 대폭 끌어올리고 있고, 경남 지역신문에서는 지난 17일 거제시가 청년일자리 창출 모델 사업을 위해 한화오션 등과 실무협약을 체결한 소식도 전했다.
김 지회장은 윤 대통령 탄핵 정국임을 감안하더라도 언론에서 비정규직 차별 문제를 더 다뤄야 한다고 했다. 그는 25일 미디어오늘에 “파면 정국이 길어지고 있어 언론이 다른 문제들에 대해 소극적인 것 같다. 이해가 되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언론이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더 어려움에 처한 소외되고 고통받는 소시민들, 자영업자들,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현재의 문제가 하루라도 빨리 해결되길 바란다”고 했다.
한편 이날 다수 언론의 무관심 속에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등 전국 58개 인권단체가 고공농성장 앞을 찾아 기자회견을 열었다. 인권단체들은 “저 높은 고공에 그것도 몸하나 누울 공간도 되지 않는 좁은 허공에 올라야하는 하청노동자의 삶은 너무나 비참하다”며 “2022년 '이대로는 살수 없다'며 1m도 안되는 철창감옥에 스스로를 가두었던 조선하청노동자의 삶이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조선업 초호황으로 회사는 수천억 원의 흑자를 기록하고 있지만 조선하청노동자의 삶은 그대로이기에 하늘로 오른 것”이라며 정부와 국회에는 하청노동자 노동권 보호를, 한화오션에는 단체교섭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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